왜 내 안에 있는 열정은 항상 충만하지 않을까
열정이 운전하는 인생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 즈음 생각해볼 만한 질문이다. 내가 말하는 열정은 어떤 힘이다. 어느 순간 자발적이고 완전히 몰입하게 만드는 어떤 에너지다. 그것이 보통 사람인 내 안에 있다. 작은 성냥개비를 황린에 그으면 산을 태울 불꽃이 생긴다. 나 또한 어떤 상황과 조건이 되면 내가 몰랐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어느 순간 자각하게 됐다. 이것을 안만큼 좀 더 잘 관리했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오랫동안 이것을 일종의 감각으로 여겼다. 평소 좋아하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경구를 따라 그저 물길이 가듯 흘려보냈다. 그러니 지금보다 젊을 때 기복이 많았다. 어느 날 나 자신을 찬찬히 톺아보니 열정을 자연 소멸하게 하는 어떤 패턴이 보였다.
나에 대한 신뢰가 열정의 지뢰였다. 스스로에 대해 자존감이 높고 기대감이 클수록 더욱 그러했다. 열정은 목표로 세운 어딘가로 이런 나를 곧장 날아가게 하는 추진체가 된다. 그 폭발력과 밀어내는 힘이 예상보다 클수록 생각보다 멀리 날아갈 것 같이 출발한다. 그러나 그 힘을 견딜만한 몸체가 준비되지 않으면 공중에서 산산조각 날 수 있다는 당연한 이치를 나중에야 깨닫는다. 나를 과신하는 태도는 요즘 시대에 '자신감'으로 자주 변용되지만, 적어도 내게는 변질된 경우가 잦았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열정에 걸맞은 몸과 마음이 준비되지 않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처음 들어간 직장에서 나를 흥분케 했던 높은 이상과 웅고한 가치는 얼마 못가 하나의 수단이자 짐이 되어버렸다.
문제는 신뢰가 아니라 나에게 있었다. 나는 늘 너무 많은 것을 고려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고민할 거리가 됐다. 환경, 상황, 여건, 관계, 감정, 평판, 분석 등... 나와 연결된 내외부의 모든 것들에 대해 사유하려 애썼다. 그게 좋은 것이라 생각했다. 객관적으로 보고 주관적인 논리를 갖는 방식이 나를 더 나은 쪽으로 이끌 것이라 막연히 바랐다. 그러나 보다시피 복잡했다. 사색이 깊어지고 길어질수록 답이 아닌 물음만 늘어갔다. 그러다 보면 결국 열정을 갖게 했던 무언가는 잊어버린 채, 열정을 가질 수 없는 모든 조건을 가진 사람처럼 덩그러니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내 나름대로 갖고 있는 본질적인 질문에서 맴돌다 본질을 움직이는 힘을 잃어버렸다. 마치 눈이 뽑힌 삼손처럼.
이런 나를 인내하게 만든 방법을 소개한다. 왠지 미로에서 헤맬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마다 처음 열정을 가졌던 자리로 돌아가려 애썼다. 나는 열정이 아니라, 열정을 가진 '자리'에 곁점을 찍고 싶다. 나로 하여금 열정을 갖게끔 만들었던 그 장소에 나를 두려고 애썼다. 전 직장에서는 2군데가 있었다. 한 곳은 트리플 모니터와 회사에서 가장 좋은 PC가 있던 내 책상이다. 회사의 미션을 내 나름대로 소화해 브랜딩 콘텐츠로 만들어 마케팅 전략을 운용하던 본진이다.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지휘대에 서듯 두근댔다. 또 한 곳은 집구석의 기도실이었다. 이른바 '워룸(전쟁상황실)'이라 이름 붙인 곳인데, 이른 새벽에 앉아 인생의 방향성을 점검하고 삶의 목적과 목표를 돌아보는 특별한 공간이다.
열정을 가질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열정을 유지하는 힘을 만들어준다. 포기하고 싶을 때 포기하지 않도록 만드는 원천이 된다. 처음에 느꼈던 열정과 같은 농도와 온도가 아닐지라도, 그 자체를 만드는 힘은 상황에 있었다. 내 인생에서 배운 작은 교훈이다. 이것을 알고 난 후로는 나를 어떤 상황에 두는 것이 유익한 것인지 이전보다 더 잘 알게 됐다. 적어도 어떤 열정을 갖고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 목표 지점까지 달릴 수 있을 것이란 용기가 생긴다. 홀연히 찾아온 열정에 탄복하여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도록 나를 단련할 수 있는 상황을 잘 가꾸고 다스리려 애쓰고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도 언제가 한 번은 찾아올 그 열정의 순간을 쉽게 놓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바다.
먼저 지레 포기하지 않고
그 상황에 계속 머물 수 있다면
열정은 계속 제 편이 되어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