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선 혜화동, 자라선 동부이촌동
1. 혜화동엔 아파트가 하나야, 아남아파트.
처음 연극을 본 것은 고등학교 때였지만, 본격적으로 연극을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대학원에 입학한 이후부터였다. 대학원에서 자주 단체 관극을 갔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나는 현대문학 전공이었고, 우리 대학원에는 현대소설, 현대시, 현대극, (현대비평) 이렇게 분과가 있었다. 극 전공의 교수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을 비롯해서 당시에는 한달에 한 두번 단체 관극을 가고, 끝나면 그 극장 근처의 모처에서 뒷풀이를 하는 것이 예사였다. 얼마나 즐거웠는지. 덕분에 혜화동, 명동, 서초 근처의 호프집을 신나게 다녔더랬다.)
나는 동대문구-중랑구 키즈였고 마로니에 공원을 좋아해서 혜화동에 종종 갔었지만 그렇게 연극을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었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인생이라 연극에 빠지게 되고 일주일에 두세 번씩도 혜화동에 가게 되면서 혜화동에 살고 싶어졌다.
혜화동엔 아파트가 하나다. 아남아파트.
2010년대 중반에는 한 5-6억 정도였다. (부동산 폭등이 있기 전이다)
언젠가 결혼을 한다면, 아남아파트에 살면서 산책하고, 나누미 떡볶이 먹고, 로스터리 카페들에서 논문도 쓰고, 마로니에 공원에서 피크닉 하고, 저녁에는 연극보고 살면 딱 좋겠다, 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렇게 20대를 혜화동에서 놀멍 쉬멍 보냈다. 곳곳에 온갖 추억을 묻혀놓고.
2. 동부이촌동은 내과 가면 20분을 봐줘.
낭만적인 결혼을 한 C 언니와 이촌동에서 만났다. 언니는 석사 과정에서 팟캐스트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는데, 음악 선곡과 감상 표현이 유독 좋았던 팟캐스트 운영자를 만나 인터뷰하다 사랑에 빠져 그렇게 결혼까지 하게 된 것이었다. 신혼집을 효창공원 근처로 얻고, 국립한글박물관에 취직한 언니는 일하다 있었던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감기 걸려서 내가 병원을 갔다? 점심시간에 간 거니까 이촌역 근처에, 그러니까 동부이촌동 쪽에 있는 내과를 간거야. 너 보통 병원가서 진료 보면 어떻게 하니?"
"뭐, 어디 아프세요. 하고 어디 아프다 하면 처방전 받거나 주사 맞지 않아요?"
"그니까, 의사 얼굴보기도 힘들고 많이 봐야 1분 보나? 청진기도 안 갖다 대는 의사가 많잖아"
"보통 그렇죠?"
"여기는... 진료를 20분을 봐"
"네? 뭐 하는데요?"
"그냥 물어봐"
"뭐를요?"
"언제부터 아팠는지, 기저 질환이 있는지, 평소에는 뭐 하고 지내는지, 일하는 환경이 좀 건조한 건 아닌지 그런거. 그리고 청진기도 한참 몸에 대고 숨소리를 듣고 약에 대해서도 막 설명을 해줘. 그리고 느긋해. 다 느긋해. 의사도 느긋하고 간호사도 느긋해. 기다리는 환자도 느긋해! 여기는 느려. 너무 우아하게 느려."
그러면서 언니는 오래오래 그 동네에 살고 싶다고 했다.
그런 건 미쳐 생각 못해봤다.
내과 진료가 20분이라. 어느 병원에서도 그런 경험은 못해봤는데?
맛있는 밥도 먹고 수다도 떨고 나서 언니와 헤어졌다.
공부할 거리를 가지고 왔던 나는 한글박물관 근처 이촌동 동네의 커피빈에 들어가서 책과 노트북을 펴고 앉아 이래저래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아담한 커피빈이었고, 유독 햇살이 밝게 들어왔다.
벽 앞쪽으로 어르신 8분 정도가 앉아서 커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계셨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정말 조용조용하게 대화를 하셨고, 그래서 나는 그분들이 있는 것을 거의 인식도 못했었다. 시간이 지나서 나갈 때 의자를 들어 바닥 끄는 소리 없이 일어나서 테이블을 원래대로 떨어뜨려 놓고, 마신 음료와 티슈를 치워서 카운터에 반납하며,
"덕분에 편하게 있다가 가요, 고마워요"
하고 또 소소소- 다들 조용히 카페 밖으로 나가셨다.
고요한 환경도 다 노력이 깃드는 것.
그날 이촌동 카페의 풍경과 내과 이야기는 그렇게 내 머리 속에 오래오래 남았다.
3. 갈 수 없다면 여기를 그렇게.
생각해보면 내가 그 동네들에서 원했던 건 단순히 '집' 자체는 아니었던 것 같다.
20분 진료를 해주는 의사, 의자를 들고 일어나는 어르신들, 저녁의 연극. 그런 여유 있는 환경과 문화를 누리고 싶었던 거겠지.
살고 싶은 동네 리스트가 여전히 내 마음 속에 있는 동안, 나는 혜화동에도 이촌동에도 살고 있지 않다. 지금 사는 동네는 그 에피소드들과는 결이 꽤 다르다. 조금 거칠고, 조금 복잡하다. 결혼하면서 남편 직장과 부모님 근처를 우선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사이 부동산이 어마어마하게 올랐기 때문이기도 하고! 뭐, 현실은 늘 그런 식으로 리스트 위에 덮어씌워진다.
그렇지만 요즘은 이런 생각이 자꾸 든다.
그 느긋함과 고요함이 꼭 어떤 동네에 원래부터 있었던 건 아닐 수도 있다고. 이촌동 카페의 그 풍경도, 어르신들이 조용조용 대화하고 의자를 들어 일어나고 마신 컵을 직접 반납하던 그 장면도, 누군가 먼저 그렇게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 아닐까. 그 고요한 환경은 저절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오래 모여서 만들어진 것일 테니까.
그렇다면 내가 먼저 그런 사람이 되면 된다. 카페에서 자리를 조용히 정돈하고, 느긋하게 말을 건네고, 서두르지 않는 사람. 그런 작은 행동들이 쌓여서 어떤 분위기가 되고, 그게 누군가에게는 오래 기억되는 인상으로 남을 수도 있다. 내가 이촌동 카페의 그 어르신들을 기억하듯이.
갈 수 없다면, 여기를 그렇게 만들면 된다. 아직은 서툴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