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로 발달한 너드는 천재와 구별할 수 없다
"게임회사 다니기 어때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내가 꼭 하는 대답이 있다.
사람들이 착하고 순해서 좋아요.
굉장히 스테레오티피컬하게 들릴진 모르겠지만, 게임회사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은 아무래도 게임에 푹 빠져있는 너드(nerd)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비하의 뜻은 아니다!) 점심시간에 회사 카페테리아를 가득 메운 직원들을 대충 살펴보면, 본인이 좋아하는 게임 캐릭터나 로고가 크게 새겨진 목이 너덜너덜한 색 바랜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 예전에 일하던 게임회사 - 설령 그것이 경쟁사일지라도- 개발팀("DEV")이라고 자랑스럽게 쓰인 낡은 후드를 뒤집어쓴 사람들을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다.
스몰톡의 가장 흔한 토픽 중의 하나는 "좋아하는 게임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질문은 종종 내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가 버리게 된다.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발매된 타이틀을 줄줄 읊는 동료와 갑자기 심도 있게 그 게임의 디자인과 아트에 대해 토론을 시작하는 동료 사이에서 "중학교 때 밤새워 한 메이플스토리"라고 대답을 준비하고 있던 나는 그저 머글처럼 생전 처음 들어보는 게임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만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게임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게임에 대한 열정과 애정은 정말로 상상을 초월한다.
입사 면접에서 상사는 나에게 "게이머"냐고 물었고 나는 아니라고 답했다. 한국에서 자라난 나에게 게이머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PC방에 가서 스타크래프트를 하던 초딩이었고, 급식비를 삥땅 쳐서 메이플 스토리 캐시템을 샀으며, 지금 내 핸드폰에 깔려있는 게임은 열댓 가지가 넘는다는 이야기를 하자, 상사는 그렇다면 나는 게이머라며 나에게 공식적으로 자격(?)을 부여해 주었다.
게이머 타이틀을 얻고 자신만만하게 입사한 나는 그러나 곧 좌절하게 된다. 인디와 메이저를 넘나드는 직원들의 취향, 좋아하는 게임 디렉터의 이름과 약력을 줄줄 읊는 사람, 그리고 그 게임 디렉터를 만나기 위해 바다를 건너 게임 관련 이벤트에 참석하고 온 사람들까지. 경쟁심이 심한 나의 성격 탓일까, 나도 그들처럼 게임 "덕후"가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긴 시간 쌓아온 그들의 덕력을 따라잡기에 현실의 벽은 너무나 높았기 때문이다.
정말로 게임이 좋아서, 게임을 만드는 것이 꿈이라서, 게임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매일 벅차올라서 출근을 하는 사람들. 과거에 일했던 어떤 프로젝트의 아트 디렉터는 꼭 팀 미팅의 말미에 이런 말을 덧붙이고는 했다.
"생각해 봐, 우리는 게임을 만들면서 돈을 받는다고! 이런 직업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이렇게 말하면 게임회사는 덕업일치를 실현한 행복한 사람들만 가득할 것 같지만, 뭐, 게임회사도 결국은 일을 하고 월급을 받는 보통의 회사이긴 하다. 하지만 내가 이 회사를 이렇게 오래 다니게 한 이유가 있다면,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열정의 순수함 때문이랄까. 게임회사의 덕후들은 쿨하고, 격식이 없으며, 건강한 피드백을 주고받는다. "좋은" 게임을 만들자는 사명감을 가지고 밤을 새우며, 다른 사람의 성과에도 진심으로 기뻐하고 칭찬을 해 준다.
나는 게임 시리즈를 연달아 히트시키고 나이 50에 슈퍼카를 모으는 디렉터가 이끄는 팀에서 일 해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직원들과 매일 플레이테스트에 참여했고 중요한 릴리즈가 있는 날에는 같이 밤을 새웠다.
모니터를 너무 오래 본 탓에 시력을 거의 잃어버린 아티스트도 있었다. 바로 앞에 서 있는 나의 얼굴이 어디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시력이 나빴는데, 그는 모니터를 500%로 확대해 여전히 게임 캐릭터를 그리고 있었다. 여담이지만 - 내가 팀에 처음 합류한 날 나를 이 아티스트에게 소개해 주던 동료가 "이 사람은 그림을 너무 많이 그려서 앞이 안 보여"라고 장난스럽게 말했는데, 나는 "와! 그거 멋지다!"라고 해야 할지, "그것 참 안 됐네"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정말 난감했던 기억이 있다.
개발자의 고질병인 목, 허리 디스크를 앓는 사람들은 주변에 많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이 만들고 싶어서 700만 원이 넘는 무중력 의자를 회사에 두고 누워서 코드를 짜는 개발자를 본 적이 있는지? (물론 회사가 사 준 것이긴 하지만)
나는 가끔 나에게 묻는다. 그들의 열정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내가 그들의 열정을 따라잡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 열정이 하나의 게임으로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내 밥값을 하기 위해 오늘도... 출근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