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공대생 시점(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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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등장인물들을 변화시킨 새로운 패러다임의 실마리는 필연적으로 유모 세바스티아나와 파멜라에게서 모습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둘은 오랜 시간 양육하며 ‘메다르도 자작’의 본질적 인격을 가장 깊이 이해하고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세바스티아나는 악한 반쪽의 나쁜 짓을 이유로 착한 반쪽을 꾸짖는다. “넌 항상 똑같은 자작이야.”라는 그녀의 말은 언뜻 메다르도 자작에게 일어난 사건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p.106). 하지만 10장에 이르러 착한 자작이 결투에서 나쁜 자작을 죽이려 달려들었던 점과, '한 인간은 자기 자신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와 같이 두 자작이 크게 다르지 않은 존재로 서술되는 경향을 볼 때, 세바스티아나 유모는 1)서로 다른 두 반쪽 모두 메다르도의 여러 가지 인격의 측면 가운데 하나라는 것과 2)선과 악이 이분법적으로 나뉠 수 없음을 꿰뚫어 보았다고 추론할 수 있다(p.46). <과학혁명의 구조> 이론에서는 이것을 '자연현상(둘로 나뉜 자작)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다다른 것으로 설명한다.[1]
다층적이고 불완전한, 성장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인격.
또한, 착한 반쪽과 나쁜 반쪽을 모두 경험한 파멜라는 한쪽을 제거하는 대신, 두 반쪽을 하나로 합쳐서 원래의 '메다르도 자작'으로 되돌려 놓자는 새로운 해결 방법을 제시한다(p.118). 새로운 이해를 통해 문제의 원인이 '둘로 나뉜 자작'에 있음을 파악하게 되며, 두 반쪽을 하나로 합치자는 새로운 해결 방법을 제시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두 개의 서로 다르게 행동하는 인격이 본질적으로 하나의 인간을 구성한다는 것을 파멜라를 비롯한 조력자들이 받아들임으로써, "다층적이고 불완전한, 성장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인격"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계획은 이야기 속 여러 문제 해결 방안 가운데 유일한 성공을 이룸으로써, 작가의 메시지인 "인간은 선과 악으로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다층적인 인격을 갖고 있으며, 사악하면서도 선한 것이 인간이다."를 명료하게 전달한다.
이러한 이야기 구조는 앞머리에서 우리가 품었던 질문인 “왜 선한 반쪽은 파멜라와 결혼하기 위해 나쁜 반쪽과 죽일 각오로 싸웠을까? 선한 반쪽과 악한 반쪽의 싸움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까?”에 대한 해답을 보여준다. 이야기에서 선한 반쪽은 이기적인 선함을 드러내고, 악한 반쪽은 상처받은 악함을 드러낸다(p.60). 나쁜 반쪽은 반쪽이 되는 것의 장점을 늘어놓지만, 폭력적으로 주변 자연을 반쪼가리로 만드는 그의 모습에서 이러한 상처받은 내면이 드러난다. 따라서 우리가 그들의 말이나 행동을 바탕으로 선함, 혹은 악함이라고 단순히 규정했던 두 반쪽 자작들 조차도, 여전히 그 안에 다양한 욕망과 모순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한 반쪽이라도 순수하게 선하지 않고, 파멜라를 욕심내어 살인을 무릅쓴 것이다. 또한 “인간 인격의 다층성, 선과 악의 혼재”을 주제의식으로 하고 있기에 두 서로 다른 인격의 싸움은, 일상 속에서 우리에게 매일 일어나는 ‘선의와 악의의 내적 갈등’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느껴지게 된다.
집단 지식 혁명 과정(패러다임 전환)의 독특한 구조는 소설 속 주변 인물들에게 인식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나’는 절대 선과 절대 악이 존재하지 않으며, ‘사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은, 사악하면서도 선한 것이 완전한 인간이자 인격이다.’라고 생각하게 됨으로써 선악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탈피한다(p.119). 또한 “솔잎은 내게는 기사나 귀부인이 되어 주었고 광대가 되기도 했다. 나는 그 솔잎들을 내 눈앞에서 움직이면서 끝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혼자 흥분했다.”라는 표현을 통해 ‘나’또한 인격 속 ‘다양한 속성’을 이해하게 되었음을 암시한다. 피에트로키오도는 아름다운 사형 기계와, 완벽하기 때문에 실현 불가능한 기계 사이에서 고민한 끝에 선을 추구하는 기계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불완전한 선을 실현하는 물레방아를 만들게 된다(p.103, p.119). 트렐로니는 도깨비불을 쫓던 순수한 과학적 호기심을 넘어 의사로서의 본분에 해당하는 의료행위와 여정을 계속해 나가게 된다. 이러한 주변 인물들의 행동 변화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인물들의 인식을 변화시키고, 지배적 위치를 확보했음을 보여준다(p.120).
이제까지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방식으로 과학(사회적 지식)이 발전해 왔다”는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을 활용하여 『반쪼가리 자작』의 이야기 구조와 작가의 메시지를 해석하였다. 먼저 소설 전반부에서 인물들의 선악 관념이나 메다르도 자작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1)인격의 완전성과 2)이분법적 선악관에 대한 믿음으로 대변되는 기존의 패러다임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선한 반쪽을 ‘성인’으로 추앙하던 사람들이 점차 기존 패러다임으로 설명되지 않는 문제들을 발견하게 됨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세바스티아나를 통해 등장한 새로운 패러다임은 1)인격 속 다양성의 존재와 2)선악의 모호성을 인식하여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지배적 패러다임의 지위를 얻었고, 이러한 사실을 소설 말미에서 ‘나’의 인식 변화를 통해 확인하였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이론을 활용하면 작가가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독특한 이야기 구조를 설계하였음을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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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Kuhn, T. "The Structure of Scienctific Revolution. 김명자, 홍성욱 역. 과학혁명의 구조. 서울: 까치..(1987)." Black Body Theory and the Quantum Discontinuity 1912 (18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