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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곰돌이 Jun 10. 2018

『반쪼가리 자작』읽기 -
과학혁명의 구조 이론으로

전지적 공대생 시점(上)

(下)편 읽기

...


슈퍼히어로 영화에서는 한동안
악당이 절대 주인공의 손에 죽지 않는다는 법칙이 있었다. 

주인공은 살인조차 하지 않는 '절대 선'을 상징하기 때문에, 악당은 자신을 용서한 영웅을 끝까지 음해하려다가 제 꾀에 넘어가 자멸해야 한다는 것이다.[1] 그런 점에서 이탈로 칼비노의『반쪼가리 자작』 속 메다르도 자작의 착한 반쪽과 나쁜 반쪽의 싸움은 독자를 의아하게 한다. 소설 속의 두 반쪽은 사랑하는 파멜라를 차지하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싸우다가, 끝내는 서로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정신을 잃는다. 이 과정을 통해 메다르도 자작은 완전한 하나가 되고, 마을에도 평화가 찾아온다. 그런데 ‘절대 선’을 상징해야 할 착한 반쪽은 어째서 나쁜 반쪽과 서로 죽일 각오로 싸웠을까? 어째서 두 반쪽의 혈전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있었을까?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반쪼가리 자작』의 이야기 구조에 담긴 작가의 의도는,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이론을 적용하면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다.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이론. 과학자들의 필독서이자, 과학철학의 시작을 알렸다.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이론은, 모든 진보가 ‘패러다임’과 관계되어 있으며,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방식으로 과학이 발전해 왔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다.[2] 여기서 패러다임이란 자연현상을 이해하는 방식, 그런 이해를 바탕으로 문제를 구성하는 방식, 문제에 대한 해답의 형태를 결정하는 지식 체계이다. 쿤에 따르면,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역할을 하는 정상과학은 패러다임의 근본 원리에 대한 검증과 반증이 허용되지 않는 상태이다. 이때에는 변칙 사례들이 존재하더라도, 사람들이 변칙 사례를 자신의 패러다임에 대한 반증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변칙 사례가 축적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변칙 사례들을 아울러 설명할 수 있게 되면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며 과학 혁명이 일어난다. 이제 <과학혁명의 구조> 이론으로 『반쪼가리 자작』을 들여다보자. 


이야기의 전반부에서, 사람들은 전쟁에서 신체의 절반을 잃고 돌아온 메다르도 자작을 흥미롭게 바라본다(p.23~p.26). 사람들은 메다르도 자작이 '반쪽'이 되었을지언정, '나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메다르도의 인격이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반쪽으로 나뉘어 존재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p.80~p.81). 또한 사람들은 '절대 선'과 '절대 악'의 존재를 믿고, 선한 것과 진실이 옳다고 생각한다(p.55). 따라서 이야기 전반부의 집단적 지식을 지배하는 패러다임은 1)인격이 다양하지 않다는 믿음2)이분법적인 선악관으로 볼 수 있다. ‘이미 사람들은 착한 반쪽을 성인이라고 생각했다.’는 ‘나’의 언급이나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적절한 사람이라면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면 되고, 부당한 사람이라면 두려움을 가지고 기다리게 되겠지.”라는 에제키엘레 노인의 언급에서 지배적 패러다임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을 확인할 수 있다(p.93, p.96). 

우리 마음속에는 착한 고양이, 혹은 나쁜 고양이만 살고 있다는 가치관이 소설 전반부의 지배적 패러다임을 구성한다.


그러나 독자와 소설 속 인물들은
지배적 패러다임으로 설명되지 않는 변칙 사례들을 만나게 된다. 

<과학혁명의 구조>에서는 “변칙 사례의 축적”이라고 부르는 과정이 바로 이것이다. 자작의 선한 반쪽이 나타나면서, ‘나’는 세바스티아나가 문둥병에 걸리지 않았음을 입증해야 할 의사로서의 책임보다 목숨 보전을 선택해 침묵한 트렐로니에게 실망하게 되고, ‘비열하다’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트렐로니에게 ‘의사로서의 소명의식’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생존본능’ 의식도 혼재한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p.48). 또 ‘나’는 나쁜 반쪽과 함께하면서 사실 모든 마을 사람들이 반 쪽짜리 인간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이는 마을 사람들이 자기 자신과 이웃들의 인격을 다층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선과 악의 단편적인 이해만을 추구했음을 드러내며, ‘나’가 기존의 지배적 패러다임에서 조금씩 빠져나오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p.61).


또한 착한 반쪽은 파멜라에게 “착한 일을 하는 것만이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라고 말하며, 파멜라를 고상하게 변화시키려 하지만 파멜라는 착한 반쪽이 읽는 시에 지루함을 느끼며, “안타까워요. 난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고 믿었어요.”라는 말로 착한 반쪽을 거부한다(p89). 이미 착한 반쪽을 성인으로 추앙하던 사람들 또한 점차 그의 행동에 불만을 갖게 되며 세상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는 지배적 패러다임에 위기가 찾아온다(p.109). 착한 반쪽은 문둥병 환자들의 영혼까지도 치료하기 위해 문둥이들 틈에서 도덕적인 행동을 하고, 부도덕한 행동에 분개하며 설교했다(p.108). 착한 반쪽의 행동은 문둥병 환자들이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게 만들고, 유희를 즐길 수 없게 만들었으며, 밝은 태양 아래서 병을 직시하고 밤이면 밤마다 절망하도록 만든다. 그러자 ‘나’는 ‘비인간적인 사악함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비인간적인 덕성 사이에서 우리 자신을 상실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말하며 지배적 패러다임에 반발감을 갖게 된다(p.101, p.108).


(下편에서 계속)



[1]. 2002년 개봉된 영화 <스파이더맨>에서, 스파이더맨은 악당 그린 고블린을 무력화시킨 뒤 살려주지만, 고블린은 무기를 조종해 스파이더맨을 죽이려 한다. 스파이더맨은 이를 본능적으로 피하지만, 고블린은 피하지 못해 자신의 무기에 죽음을 맞는다. 2006년 개봉된 영화 <슈퍼맨 리턴즈>에서는, 슈퍼맨이 악당의 목숨을 살려주었음에도 악당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재물을 챙겨 달아나려다가 곤경에 처한다. 이러한 슈퍼히어로 영화의 법칙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2008년작 <다크 나이트>와 배트맨 3부작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깨지기 시작한다.


[2]. Kuhn, T. "The Structure of Scienctific Revolution. 김명자, 홍성욱 역. 과학혁명의 구조. 서울: 까치..(1987)." Black Body Theory and the Quantum Discontinuity 1912 (1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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