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다면, 똥은 싸게 되어 있으니까.
최근 몇 달간 TMI라는 신조어가 유행하면서 친구들을 통해 그 뜻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TMI란 'Too much information'의 약자로,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을 때 그건 'TMI야'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TMI라고 생각하는 것들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가령 친구와의 만남에서 '오랜만에 똥을 누고 나왔는데 냄새가 고약했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상대방의 배변 활동에 관련된 특이사항이 궁금한 사람은 많지 않을 테니까(가까운 이성 파트너라 할 지라도 말이다).
청결을 강조하는 현대 사회 구성원으로 '똥'과의 만남이 어떤 방식으로든 유쾌하지 않은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매일 아침 화장실을 가기 전에 어떻게든 이 불쾌한 만남을 피해보고자 발버둥을 치지만, 결국에는 불쾌한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며 흉측한 소리와 악취를 견디고야 만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똥(배변활동)은 거의 모든 동물과 식물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하루살이라는 예외가 있지만). 한 자리에서 태양 에너지를 꼬박꼬박 얻으며 자급자족하는 식물에 비해, 먼 거리를 이동하는 능동적인 행위를 통해 생존하는 동물은 거의 예외없이 배변활동을 한다. 마치 공짜폰을 얻기 위해 쓸데없이 비싼 휴대폰요금 계약을 휘갈겨야 하는 것처럼, 삶에 있어 능동성이라는 선물의 획득은 한편으로 종종 더러운 똥을 누어야 함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개똥같은 '똥'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때때로 글을 쓸 때 '마치 키보드로 똥을 누는 것 같은' 끔찍한 기분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렇듯이 항상 영감으로 가득차 글을 쓸 수는 없다. 과제를 해치우기 위해 글을 쓰기도 하고,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하기 위해 글을 쓰기도 한다. 쓸 만한 연구 주제가 나오기를 바라면서 개똥같이 말도 안 되는 가설을 열댓 개씩 적어 보기도 한다. 와, 이번에도 망했구나. 도저히 이건 말도 안돼. 이건 너무 창피해. 차라리 당분간 쓰지 말까. 관두면 벗어날 수 있을까. 종종 글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을 때 내가 적어 놓은 개똥 같은 글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이런 똥 같은 글을 쓰지 않을 수 있는지 고민한다.
하지만 건강하게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똥을 누어야 한다. 사람보다 정교한 기계조차 몇 퍼센트의 확률로 불량품을 찍어내는데, 그보다 불완전하고 미숙한 사람의 불량률이야 말해 무엇할까. 모든 작업이 완벽한 결과만을 낼 수는 없기에 일부는 부정적인 면을 가진 부산물을 생산하게 되겠지. 그래도 살아 있다면 꼭 나쁜 일만은 아닌 듯 하다. 우리는 조금 더 건강한 생각을 하며, 먹기 좋은 맛으로 표현하고, 가끔은 거울 앞에서 예전보다 건강해진 모습에 성취감을 느끼기를 바랄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말처럼, 똥도 가만히 살펴보면 기막히게 쓰임새가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개똥 같은 글을 쓰는 것보다 더 두려워 해야 할 것은, 개똥같은 시행 착오가 두려워 살아 있기를, 온전한 삶을 되찾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살아 있으니까, 분명히 깨어 있으니까 마땅히 그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