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는곰돌이 Nov 08. 2018

한국을 떠나는 이유: 나쁜 나라여서가 아니라

네덜란드 유학생이 본 한국과 유럽의 대학생들

사람들은 유독 '헬조선'이라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 

지지하는 쪽에서는 한 단어로 한국 생활의 어려움을 모두 표현하려는 듯하고, 반발하는 쪽에서는 '이 정도 사는 것도 예전보다 훨씬 나은 환경인데, 어렵게 생활해 보지 못해서 그렇다'라고 한다. 사실 어느 쪽도 틀린 주장은 아니다. 이만큼 한국 생활의 어려움을 자극적으로 드러내는 표현도 흔치 않고, 또 반대로 지난 반세기 동안 눈부시게 성장해 온, 그리고 이제는 자타가 공인하는 선진국으로서 인권이나 성평등과 같이 시민의식도 빠르게 성숙하고 있는 한국을 '지옥'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도 억울한 부분이 있다. 유럽에서 공부하다 보면 한국에선 당연하게 생각했던 부분들이 허전하게 느껴지고, 더욱 아쉽게 느껴지는 때도 있다. 말하자면, 한국은 나쁜 나라가 아니다. 짧은 시간 동안 가난에서 벗어나 산업을 선도하는 나라가 세계에 몇 개나 있는가. 한국사람도 나쁜 사람이 아니다. 세계에서 잘 교육된 사람의 비율이 가장 높은 국민 가운데 하나이고, 남성 중심적, 유교적 문화에서 빠르게 벗어나고, 또 그러기 위해 치열하게 시민운동을 전개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이다. 다만, 때때로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청년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가 해 주신 김치찌개를 좋아한다. 감기에 걸렸을 때는 집 앞 뜨끈한 순대국밥 생각에 입맛을 다신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청년이 살기에는 쉽지 않은 나라다. 그리고 더 안타까운 점은, 그걸 바꿀 수 있는 힘이 청년에게는 많지 않아 보인다는 점이다. 먹고사니즘을 해결하기에도 급급한 사람들, 그러기에도 부족한 시간은 목소리를 한데 모으기 어렵게 만든다. 수년 째 지지부진하고 있는 고교생 투표권 논쟁, 매년 최악을 향해 기록 경쟁을 하는 취업/실업률은 청년들에게 사회를 바꿀 수 있는 힘이 많지 않다는 생각을 더욱 깊어지게 한다. 


이곳 네덜란드의 작은 도시에서 생활하다 보면, 수많은 나라에서 찾아온 사람들을 만난다. 

독일이나 영국, 프랑스 같은 강대국들 뿐만 아니라 스페인, 그리스, 카자흐스탄, 포르투갈, 이탈리아, 폴란드, 베트남 등 대개 한국보다도 더 큰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사회가 덜 안정된 국가에서 온 사람들과도 종종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영어를 뚜렷하게 잘해서가 아니라, 이곳에 훨씬 더 많은 기회를 찾아온다. 취업을 걱정하지 않고, 내 집 마련에 허덕거리지 않는다. 인턴십을 통해 졸업 직후 자연스럽게 경력을 살려 좋은 일자리로 진출할 수 있고, 높은 공공임대주택 보급물량이 사회 정착을 돕는다. 


한국 역시 10년, 늦어도 20년 뒤에는 비슷한 미래로 나아가면서 답을 찾을 것 같다. 그런데 청년들은 지금 당장 살아야 한다. 당장 생존 걱정 없이 취업하고, 일하고,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은 지금 청년들에게 그것을 주기 어렵다. 10%, 5%에게는 원하는 것을 줄 수 있을지 몰라도 수능 4등급 정도 되는(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답을 주기 어려워한다. 답을 주려고 하기는 하는지 잘 모르겠다. 기껏해야 공장에 가서, 열악한 환경에서 최저 시급을 받으며 언젠가 세상이 조금 더 나아지기를 기도하라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다. 미래 없는 직장 생활에 지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가, 두어 번쯤 실패하고 뒤돌아 보면 이십 대 후반. 공부에 흥미는 없었어도 어른들 말씀 잘 듣고, 잔꾀 부리지 않고 언젠가 나아지겠지, 아니면 최소한 적응이라도 하겠지 하면서 지나왔는데 그냥 지나오기만 한 모양이다.


이곳에는 기회가 있는 것 같다.

비행기 타고 여덟 시간, 달라진 것은 약간의 풍경과, 문화와 언어밖에 없는데 사는 모습이 달라지고, 표정이 달라지고 그리는 미래가 달라지는 것을 경험할 때, 허탈감을 느낀다. 체코는 구직자보다 일자리가 더 많고, 네덜란드는 '고학력자를 위한 진로탐색 기간' 제도를 통해 세계 톱 200위 대학(서울대, 포항공대, 카이스트, 고려대, 성균관대)에서 석사 혹은 박사학위를 취득한 고학력자들이 취업 이전에도 네덜란드에 1년간 체류하며 구직활동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다. 취업 이후 5년이 지나면 영주권을 제공받아 경제적 혜택을 온전히 누릴 수 있다. 스웨덴/덴마크/네덜란드/독일 모두 비슷하다. 장학금 제도도 풍부해서 한국에서 인 서울 대학을 졸업한 후에 이곳에서 풍부한 장학지원을 받으며 석사 코스를 밟고 있는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굳이 고학력자가 아니더라도 기술을 배워 이민할 수 있는 방법 또한 열려 있다(더 환영받기도 한다).


어느 곳에서는 아직도 20대의 고생은 경험이고, 너 아니어도 여기 들어오고 싶은 사람 많다는 말이 익숙한데 또 다른 곳에서는 총리가 다른 나라까지 찾아가 대학생들과 만나고, '아직 일자리가 많으니 더 많은 청년들이 와서 공부하고 일해줬으면 좋겠다'라고 이야기한다. 



한국은 자랑스러운 나라지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회는 한국 바깥에 더 많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가끔 들 때가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네덜란드는 진보적인 국가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