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정책으로 보는 네덜란드 사회와 '진보성'
<스물셋, 네덜란드 세렌디피티_7>
'워라밸'을 꿈꿔본 적이 있는가. 남이야 동성연애를 하든 동성결혼을 하든 왜 법원이 배우자를 정해줘야 하는지 의문을 품은 적이 있는가. 쓸 데 없는 아침 조회와 사회생활을 위한 회식자리에 분노를 느껴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마음은 이 한 마디로 요약될지도 모른다.
나 네덜란드에서 살고 싶어.
네덜란드란 무엇인가? 네덜란드는 한국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국가이며, 다른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사회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회가 그렇듯, 네덜란드라는 이미지는 '유사 유토피아'와 같은 개념으로 소비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직장생활과 일상생활의 균형을 논하는 글이나 다큐멘터리에서(이만한 흥행 상품도 드물 것이다) 네덜란드의 일화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네덜란드에 사는 한국인들은 우리와 똑같이 생겼지만 저녁 6시가 되면 퇴근하고,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고, 아이를 유치원에서 데려오기 위해 직장 상사의 진부한 잔소리를 소비할 필요가 없다. 그들의 일상이 페이드아웃 되며, 한국과 네덜란드의 삶의 질을 비교한 그래프가 보여진다.
일과 삶의 균형 지수(장시간 근무하는 노동자의 비율과, 자기관리 및 여가에 활용하는 시간을 기준으로 측정한 지표이다)에 따르면, 네덜란드는 10점 만점에 9.3점을 기록하여 2016-2017년 연속 1위를 차지했고, 한국의 점수는 4.7점으로 35개 OECD 회원국 가운데 뒤에서 4번째였다. 그들과 우리의 다른 점은 단지 '네덜란드'에 사느냐, '한국'에 사느냐의 차이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말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한국 사람들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다른 서구권 국가들에서도 네덜란드는 비슷한 이미지로 소비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국가
사람들은 네덜란드를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국가"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덧붙이자면, 미국의 비영리단체인 사회발전 조사기구가 2017년 발표한 세계 133개국 사회진보 지수(SPI) 순위에서도 네덜란드는 덴마크, 캐나다, 스위스보다 조금 낮은 7위에 랭크되었다. 대단히 진보적이지만, 가장 진보적인 나라는 아니다. 이 지수는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 충족, 사회적 기회, 웰빙의 기초 조건 등의 3가지 범위를 기준으로 인권 / 교육 / 건강 / 범죄율 / 관용-포용력 등 53개 부문에 걸쳐 산출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진보'라는 단어가 위의 53가지 요인들을 통해 설명될 수 있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보'와 '네덜란드'를 자연스레 관련지어 떠올리는 까닭은 무엇인가? 많은 경우 그 까닭은 '진보적'이라고 회자되는 정책들이 네덜란드 사회에서 통과, 시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보적'이란 무엇이고, '네덜란드 사회'는 진보적인 것일까?
네이버 백과사전에 따르면, '진보주의'란 현재의 정치, 사회체제, 문화 등을 새롭게 바꾸려는 성향이나 태도를 말한다. 사회 질서 유지와 경제적 자유를 추구하는 보수와 달리 진보는 상대적으로 자율성, 경제적 평등이라는 가치를 옹호한다. 하지만 '진보'라는 개념은 절대적 개념이 아니어서 시대적, 역사적 배경에 따라 상대성을 띄는 개념이다. 가령, 어느 신학자는 종교계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네덜란드를 이렇게 묘사하기도 했다. "... 피와 땀의 결실로 일구어 놓은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가 세속화와 방종의 나라로 퇴색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성령의 비상한 능력으로 인한 부흥이 이 땅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하는 절박한 기도가 솟구쳐 올랐다...." 이 신학자에게 네덜란드의 사회적 진보는 후퇴이고 추락이었을 지 모른다.
네덜란드 사회가 진보적이냐, 아니냐를 살펴보는 데 있어 눈길을 끄는 정책은 '성매매 합법화'나 '동성결혼 허용'보다도 '유아 예방접종의 선택권 보장'정책이다. 유아 예방접종 선택권을 보장하는 정책은, 홍역과 같이 유아에게 필수적으로 접종해야 하는 전염병 백신에 대하여 그 부모가 맞힐 것인지, 맞히지 않을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방접종의 선택권을 보장하는 것은 백신에 대한 유럽 사회의 낮은 신뢰도와 관련되어 있다. 2016년 세계 67개국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유럽 지역 국가들은 백신에 대한 가장 낮은 신뢰도를 보여주었고, 특히 네덜란드/미국/ 캐나다의 고등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석사, 박사 학위 소지자)에게서 조차 백신 접종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빈번하게 나타났다.
이 보건정책이 흥미로운 까닭은, 앞선 두 정책이 객관적 자료(가령, 네덜란드의 성매매 여성들은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고, 성매매 산업과 관련된 범죄나 에이즈 감염은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다. 동성결혼 허용은 네덜란드 사회와 경제에 상당한 이익을 안겨주고 있다)나 생명과학적 사실(여성호르몬이 과다 분비되는 남성, 남성기와 여성기를 모두 갖는 여성 등 오늘날 인간은 여성과 남성만으로 구분되기 어렵고, 여성과 남성의 결합만 제도적으로 인정하는 결혼제도의 보완이 필요했다)로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는 반면에, '유아 예방접종의 선택권 보장'은 모든 유아에게 접종하는 것이 개인으로 보나, 사회 전체로 보나 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성매매 합법화나 동성결혼 허용과 같은 정책들의 경우에는 개인-사회-국가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과는 별개로 그것이 옳다, 혹은 옳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지만, 적어도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종교적 믿음이 흑과 백처럼 이분법적이지 않고, 그것이 선형적인 스펙트럼 위에 있지 않다는 것도 이해하지만, 여전히 예방 접종 선택권을 보장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우리가 공대생이라서 앞뒤가 꽉 막힌 걸까?
유아 예방접종, 하기 싫으면 하지 마세요.
네덜란드의 예방접종은 의무가 아니며, 보육원이나 공교육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요구되지도 않는다. 부모들은 자녀의 예방접종에 동의할 수도, 거부할 수도 있다. 이러한 정책이 나오게 된 배경은 네덜란드의 보수적인 칼뱅주의 청교도들과 관련되어 있다. 오늘날에는 유아에게 접종되는 많은 종류의 백신 원료를 human diploid cell이나 원숭이 태아의 허파 세포, 닭 배아의 섬유세포, 송아지 태아의 신장세포 등에서 획득하는데(WHO), 칼뱅 주의자들이 주로 거주하는 'Bible Belts'의 공동체에서는 종교가 사회에서 비교적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어 배아/태아 세포를 이용해 만들어진 백신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지난 2013-2014년 네덜란드에서 홍역이 집단으로 발병했을 때, 94% 이상이 백신을 접종받지 않은 영아였고, 그 가운데 84%가 종교적인 이유들로 접종을 거부한 경우였다. 실제로 홍역이 발생한 지역을 살펴보면, 기독교/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높은 곳과 상당히 유사한 분포를 나타냈다.
과학적인 측면에서 이것은 합리적이지 않은 선택인데, 백신 접종이 영아의 감염 위험성을 획기적으로 줄여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가령 홍역의 경우, 1회 접종으로 95% 이상의 사람에게서 항체가 생성되며 면역력이 거의 평생 동안 유지된다고 알려져 있다. 백신은 과학적으로 검증되어 있으며,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도시 인구를 고려할 때 몇몇 전염병으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필수적인 방법이다. 더군다나 백신을 거부한 사람이 타국을 방문할 경우, 전염병에 감염되거나 풍토병 발병인자를 들여올 수 있어 전염병의 위협에 더 많은 국민들이 노출될 위험성을 안고 있다.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고 증진하는 정부로서의 역할을 상기해볼 때, 백신 예방접종을 강제하지 않는 정부의 선택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진보적인'을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에 기반한'이라고 해석한다면 이 정책은 진보적이지 못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필수적인 예방접종마저 강제하지 않으면서 개개인의 종교/선택의 자유를 보장하는 네덜란드의 보건정책은 진보적인가, 아니면 '종교에 관한 한'보수적인가? 그들의 진보는 국민들을 오히려 위험에 빠뜨리고 있지는 않은가? 실제 네덜란드에서 발병하고 있는 전염병을 보면 지나칠 정도로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는 게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지금까지 우리가 나눈 이야기에 그 답이 있을지 모른다. 보행자 중심의 교통 시스템, 노동자-고용주의 협의 끝에 탄생한 노동정책에서 보듯, 네덜란드는 '사람'을 중요하게 여긴다. 전 세계에서 1500만여 명 밖에 없는 네덜란드인은
글쎄, 홍역 사태를 보면 자유가 너무 지나친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지만, 선택권을 보장함에도 접종률이 95%를 넘어가고 있는 네덜란드 보건당국의 자료를 보면, 사회학을 심도 있게 전공할 생각이 아닌 이상 굳이 따져 물어야 할 개념일까 싶기도 하다(네덜란드는 각 가정의 선택권을 보장하고 차별하지 않되 접종률을 높이기 위해 백신과 관련된 자세한 정보들을 안내하는 등, 여러 보완책을 내놓고 있다.)
누구나 때로는 진보적일 수도 있고, 때로는 보수적일 수도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런 '정책'과 생각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나왔는가 하는 것이 아닐까. 어떤 가치를 목표로 하고, 어떤 합리적인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으며,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는가. 클린턴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저는 실행하는 진보주의자입니다. 진보주의란 말 그대로, 전진한다는 의미입니다."
네덜란드는 진보적인 국가인가. 한국은 진보적인 국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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