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지 할 수 있다'는 말은, '무엇이든 감수하겠다'는 말과 같다
<스물셋, 네덜란드 세렌디피티_5>
네덜란드는 두말 할 것 없이, 선진국 사회 가운데 그 사회의 구성원에게 가장 많은 자유를 허락하는 국가 중 하나이다. 가령 안락사, 그 가운데서도 의사가 적극적인 방식으로 환자의 생명을 끊을 수 있는 안락사를 2002년 세계 최초로 합법화한 국가이다(네덜란드 내 안락사를 통한 사망은 2017년 전체 사망률의 4.5%를 차지하고 있다). 최근 캐나다에서 합법화되어 세계의 이목을 끌었던 마리화나를 42년 전에 합법화한 곳이기도 하다. 오래 전부터 홍등가와 성 매매를 합법화하여 암스테르담 시내를 비롯한 주요 도시 곳곳에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국가 공인' 홍등가가 있고, 라이브 섹스 쇼나 매춘 박물관을 찾는 관광객들의 발걸음으로 매일 붐빈다는 사실 또한 네덜란드의 '자유'가 어느 정도인지 설명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게다가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이 고국으로 서둘러 돌아가야 하는 여행자도 아니고, 영원히 눌러 살아야 하는 이민자도 아닌 잠시 머물다 가는 유학생이라면 마음은 훨씬 가볍게 마련이다. '의미 있는 걸 해야 한다'거나, '뒤처진다'는 부담감으로부터 자유롭고, 곧 떠날 테니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일도 없다. 마치 삶의 수레바퀴를 잠시 멈춰 둔 듯 하다. 그러면서도 출석은 100% 자율에 맡겨 놓아 100명이 수강하는 수업에 참석하는 학생은 채 서른 명이 안 된다. 유학을 오기 위해 최소한의 준비 기간은 있었을 테니 먹고 살 걱정도 한국에서만큼 지독하지 않다. 잔소리 해 줄 사람들로부터 10,000km 떨어지게 되는 것은 덤이다. 그러므로 네덜란드에서, 유학생이 된다는 것은, 거의 '무한'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과 같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유학생에게 자유란, 한국에서처럼 그것을 얻기 위해 구태여 애쓸 필요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우리는 권장되는 삶(인정받는 대학교, 안정적인 직장과 가정)이라는 사회적 압력으로부터 고유의 가치를 고수하기 위해 분투해야 하지만, 네덜란드에서 자유는 낙엽처럼 길가에 널브러져 있다. 사람마다 도덕적 가치관이나 삶의 방식, 문화가 제각각 다르다 보니 무엇이 옳고, 그른 지 '기준'조차 애매하다. 독실한 신앙인으로 금욕적 삶을 추구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매일 밤 클럽에서 이성과 번호를 교환하고, 덤불 속에서 사랑을 나누는 이도 있다. 출석이 자유로우니 온라인 강의를 수강하며 학기 내내 학교에 가지 않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럼에도 매일 강의에 참석해 교수님과 토론하는 이들도 있다.
네덜란드에 온 이후로 거의 매일 파티 참가 권유 메시지를 받았다. 영화 파티, 국제 언어 파티, 바비큐 파티, 라틴 댄스 파티와 같이 크고 작은 파티가 매일같이 열린다. 점심, 저녁, 커피 등 소규모의 모임은 물론이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과의 모임'이 흔치 않은 우리에게,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사상이 깊게 배어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이곳 네덜란드에서 밤마다 파티가 열린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기까지 하다.
대개 술을 동반하는 경우가 빈번한 파티들은 술을 이용해 반 쪽짜리 일체감을 만들어내고, 종종 공허함을 남긴다. 공허함이라는 심연에 빨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 뭔가에 홀린 것처럼 게걸스럽게 관계를 찾아 헤맸다. 파티에 개근하고, 술자리에 어울리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과연 '교류-어울림' 그 자체 였을까? 인터넷으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도 얼굴을 마주 보고 통화할 수 있는 세상이지만 여전히 다른 종교, 다른 인종에 대한 편견과 오해가 만연한 것은 서로 어울릴 기회가 부족해서일까, 아니면 교류의 방식에 변화가 필요해서일까?
웃음소리가, 즐거움이 갑갑했다. 너무 쉽게 당신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해라는 단어는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지독한 쉰내가 나는 찬밥처럼 그 온기를 잃었다. 모든 게 풍족한 저녁 밥상에 뭔가가 빠져 있었다. 결국 이런 저런 모임을 찾아 다니며 관계의 허기짐을 채우는 일을 그만 두었다.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을 몇 개월 간 넘나들며 핸드폰 지도 앱에 수백 개의 별표를 쳤다.
맛있다는 추천에, 예쁘다는 추천에 얼굴도 본 적 없는 타인들의 추천에 별은 끝없이 번식했고 어느 새 은하수가 되어 버렸다.
덕분에 나는 블랙홀에 빠져 버렸다.
내게 필요한 것은 남의 은하수가 아니었다. 나만의 견고한 별 하나였다."
- 김민철, 모든 요일의 여행 -
이런 네덜란드에서 지내다 보면, 가끔 외재적으로 주어지는 압박감이 그리울 때가 있다. 누군가가 이끌어 데려가 주었으면, 외로움을 다잡기 위해 독해질 필요도 없고,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부담감도 사라질 텐데, 하고 자유를 도로 가져가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꼭 제 마음대로 제 삶을 운전해야만 할 까? 정말로 책임질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대신 핸들을 맡기고, 열심히 액셀을 밟으면서, 언젠가 목적지에 다다르면 그게 내가 원하는 것이었다고, 그렇게 생각해버리면 바보 같은 걸까, 하는 충동에 휩싸일 때가 있다.
삶이, 우리에게든 타인에게든 의미를 갖게 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되기를 꿈꾸지만, 그것이 갖는 책임에 대해서는 여전히 낮설다. 자유를 외치는 사람은 많지만, 책임을 통감하는 사람은 그보다 적다. 마치 청구된 카드빚을 갚아 나가는 것처럼, 뒤늦게 그 무게를 실감하곤 한다. 영화 <안녕 헤이즐>에서는 헤이즐이 암스테르담에 도착해 택시운전사 아저씨와 함께 네덜란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이 집들은 많이 오래됐나요?"
"대부분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죠. 우리 도시에는 화려한 역사가 있어요. 비록 관광객들은 대부분 홍등가만 보고 싶어 하지만요."
아저씨가 잠깐 말을 멈추었다.
"어떤 관광객들은 암스테르담이 죄악의 도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 여긴 자유의 도시에요. 그리고 자유가 있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악을 찾죠."
사람들은 종종 '자연스러움'을 중요하게 여긴다.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데는 '자유'만한 게 없다. 그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몸이 이끄는 방향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가기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자유'와 '자연스러움'은 그 방향이 가리키는 길 까지 '좋은 길'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길에 대한 고민 없이, 충동적으로 방향을 결정해 버리게 만드는 것 같다. 스물 셋의 자유에 따르는 책임은 10대의 반항심에 내뱉는 책임도 아니고, 스무 살의 호기로 장담하는 책임도 아니다. '캐삭(캐릭터 삭제)' 하고 처음부터 다시 키울 수 있는 게임 속 책임도 아니다(게임에서도 캐릭터를 삭제하는 결정은 어렵다). 떡국 두세 그릇을 더 먹었을 뿐인데, 곱빼기로 먹어서 그런지 한 걸음씩 선택하는 발걸음이 예전보다 훨씬 무거워졌다.
자유롭게, 그래서 자연스럽게 고른 방향이 좋은 길을 가리키도록 하려면 단단하게 다진 '나'라는 가치관 위에 기준을 세우고, 얼기 설기 엮은 규칙대로 살아야 하는 것 같다. 규칙에 얽매이면 길을 잃어버렸고, 규칙을 무시하면 길을 알아도 소용이 없었다. '나'라는 가치관이 무르면 규칙이 무너졌고, 너무 경직되어 있으면 어느새 고리타분한 것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속 편히 '남'의 가치관에 기준을 세우면 결국 그 자리를 못 견뎌 떠나버리게 되고 말았다. 소설가 고(故) 박경리 선생님은 자기를 위한다는 것, 자존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정신적 가치 대신에 물질이 힘을 발휘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자기 자신이 자기를 위해 살아가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를 위한다는 것은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는다는 뜻이 아니라 자존심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자존심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귀하게 받드는 것을 말합니다.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누구보다 자유로웠던 한국에서 항상 답답했던 가슴 한 켠이, 네덜란드로 오는 좁디 좁은 횡단 열차 안에서 자유로웠다. 어찌 보면, 진실로 자유로운 삶이라는 것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가치관으로 촘촘한 규칙의 그물망을 짓고, 걸러진 것들만을 선택하는 인위적이고 의도적인 삶인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