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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곰돌이 Dec 23. 2018

네덜란드 알바생이 먹고 살 만한 이유

'노동'도 행복해야만 하는 우리 '삶의 일부'니까

네덜란드 유학생에게 Lidl, Albert Heijn과 같은 마트는 학교보다 더 자주 들르는 곳 가운데 하나다. 유학 초기에는 신선한 토마토나 양파, 우유 등을 구하기 위해서 자주 들렀고 방학이 가까워지는 요즘은 과일이나 샐러드, 푸딩 따위로 대충 끼니를 때우기 위해 들르곤 한다.


마트에서 물건을 고르고 계산을 할 때면 항상 지나는 곳이 있으니, 계산대가 바로 그곳이다. 그런데 이곳의 계산대, 정확히는 계산원들의 모습은 한국의 그것과 조금 다른데, 직원들의 연령대나 인종이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고령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근무하시는 가 하면, 또래의 사회 초년생(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앳된 직원이 근무하기도 한다. 물론 40대 정도 되는 중년 여성이 근무하기도, 남미 출신의 이민자로 추정되는 직원이 근무하기도 한다. 주로 30대 중반~50대 후반의 중년 여성들이 근무하는 한국 대형마트의 계산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이런 모습이 특이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한국에서 대형 마트 계산원이 받는 대우가 열악해서, 특정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경력이 단절되었으나 생활비 보조를 위해 일선에 복귀하려는 경우가 많다)이 아니면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직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긴 노동시간이 요구되는 이런 직종에서는 10대 후반~ 20대 초중반의 젊은이들이 학업과 일을 병행하기 어려워, 근무하는 경우가 드물다.


뿐만 아니라 청년층은 자본 수익(주식, 부동산 등을 통한 수익)이 거의 전무하고, 전적으로 생계를 노동소득에 의존해야 하는 만큼, 보다 양질의 일자리를 찾아 떠나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와는 반대로, 자본수익의 비율이 높은 고령층 노동자도 이러한 노동환경에서 살아남기 어려운데, 긴 노동시간과 열악한 근로환경 탓에 고령의 나이가 한국의 고용주들에게 선호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어쩔 수 없다고 느껴지는 이유들이다.


(c) pixabay

그런데 이는, 반대로 생각해 보면 네덜란드의 계산원 일자리는 상대적으로 근무시간의 조정이 자유로우며, 고령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합의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형성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그렇다.


유연 안정성 시장 모델

네덜란드의 근로 환경에 영향을 미친 정책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유연 안정성 시장 모델'을 통해 비정형 고용을 확산시킨 것이다. '9(오전) to 6(오후)'로 대변되는 정형화된 노동형태에서 벗어나 개개인의 생활에 맞춘 노동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당연시되고, 근로자는 유연하게 근로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 보장되어 있다.


2017년 Eurostat이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네덜란드는 전체 근로자 가운데 49.7%가 시간제 근로자(주당 35시간 미만 근로)로 근무하고 있고, 이 가운데 대부분(80% 이상)이 자발적으로 시간제 노동을 선택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 결과,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네덜란드 병'이라는 이름을 얻을 정도로 높은 실업률과 사회복지 의존율, 낮은 고용률 등의 문제를 경험했던 네덜란드는 오늘날 유럽에서 가장 효율적이면서도 안정적인 고용을 자랑하는 나라로 완전히 탈바꿈했다(정희정, 2007).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유럽을 한 차례 휩쓸고 간 뒤에도 네덜란드의 고용률(15-64세 인구 가운데 취업자의 비율)은 74%로, 유럽 국가 가운데 덴마크와 스웨덴 다음으로 안정적인 고용환경을 지켜냈다.

네덜란드의 유연안정성 시장 모델은 주변 국가들로 확산되었으며, 한국에서도 이를 벤치마킹하려는 사례가 있었다. 바로 박근혜 정부에서 '노동시장 유연화', '고용률 70% 로드맵', '노동개혁'등을 표방하며 유연 안정성 모델을 연구하고 수입하고자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노동 시간이 감소함에 따라 소득이 감소하는 문제가 발생했고, 노동자에게 불리한 기존의 고용 환경에 법적-제도적 보호장치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시행하는 바람에 오히려 한국의 노동 환경을 악화시키고 말았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네덜란드와 한국의 차이로 지적되었던 유연 안정성 방식의 핵심 가치는, 노동자의 고용시간을 유연하게 조정하는 대신 비정규직의 노동권을 정규직과 동등한 위치로 상승시켜 고용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정규직의 해고를 원활하게 하는 대신 시간제 근로자들의 불안정한 위치를 노동법과 사회법의 개정을 통해 안정적으로 만들고 시간제 근로를 선택하도록 장려함으로써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여 왔다. 근로자들이 결혼, 육아와 같은 생애 주기에 따라 노동시간에 대한 선호도가 달라지는 만큼, 이 요구를 수용하여 근로자들이 한결 수월하게 일과 가정의 균형을 관리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는 것이다.


1996년과 2000년에 시간제 노동 동등 대우법(Equal Treatment of Full and Part timers)과 노동시간 조정법(Working Time Adjustment Act)을 제정하여 시간제 근로자에 대한 법적-제도적 보호 장치를 마련하고 근로자가 스스로 노동시간의 조정을 요구할 권리를 보장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관련 연구에 따르면, 네덜란드 고용주 10명 중 9명이 근로자로부터 근로시간 단축 또는 연장 신청을 1건 이상 접수한 경험이 있으며, 그 중 고용주의 4분의 1만이 신청을 거부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시간제 노동이 20여 년간 네덜란드 사회에 뿌리내리면서 여성의 경력단절과 사회적 비용을 낮추고 사회활동을 높이는 데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반면에, 시간제 일자리가 폭등한 것을 긍정적으로만 바라볼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고용률이 증가하기는 했지만, 새로운 일자리의 창출을 통한 것이라기보다는 기존의 일자리를 나눈 것에 더 가깝다는 점에서 오히려 중산층을 약하게 하고, 빈부 격차를 증가시키는 데 일조했다는 주장도 있다. 2007년 통계자료에 따르면, 근무시간이 유연한 일자리를 선택한 이유를 묻는 조사에서 '풀타임 일자리를 찾지 못해서'라는 응답은 25%로, '자유로워서(13%)', '일과 육아의 균형(9.3%)', '일할 시간이 부족해서(9.6%)', '잠깐 용돈좀 벌려고(11.4%)'와 같은 답변에 비해서는 적었지만 상당한 응답자들이 원하는 만큼의 풀타임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벌기를 원한다.
(Laula Den Dulk, 교수)


원하든, 원하지 않든 노동은 우리 삶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한다. 모든 가치가 화폐로 환산되는 자본주의에서는 누구도 필요한 가치를 획득하기 위해 자신의 노동을 화폐와 교환해야 하니, 과학자도 마찬가지다. 먹고살기 위한 생물학적 필요뿐만 아니라 삶의 의미를 얻기 위해서도 노동은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삶을 탐구하는 데 있어 노동을 중요한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노동행위  = 필요한 만큼만!

누구도 노동행위에서 벗어날 수 없고, 삶에 있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면, 필요한 만큼만 하면 되지 않을까? 왜 누군가는 과하게 많은 급여를 받고 일하느라 가족과 저녁을 함께하지 못하고, 누군가는 한 시간이라도 일하지 못해 매달려야 할까? 2009년 네덜란드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전체 네덜란드 국민 가운데 현재와 같은 노동시간에 만족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12-24세 78.2%, 24-35세 81.6%, 35세 이상에서는 89.3퍼센트로 매우 높았다. 뿐만 아니라, 2016년 개정된 네덜란드의 근로시간 조정법은 근로자에게 근무 장소의 변경을 고용주에게 신청할 수 있는 권리도 보장하기 시작했다. 재택근무나 원격근무 같은 것이 대표적으로, 최대한의 효율로 일과 생활의 균형을 맞추며 근로자와 회사가 모두 만족할 수 있는 근로형태를 위해 끝없이 고민을 이어나가고 있다. 

(c) pixabay

16세기 유럽의 인문주의자였던 토마스 무어는 그가 오랫동안 꿈꿔 온 이상적인 나라 '유토피아'를 네덜란드 루벤에서 처음 출판했다. 농민들은 더욱 비참해지고, 수익이 급증한 귀족과 사제들의 사치가 사회적 문제로 등장한 유럽에서 무어는 에라스무스와 함께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유토피아'를 주장했다. 그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오늘날 우리 대부분은 교육, 종교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있는 세계에 살고 있다. 


500여 년 전 <유토피아>가 네덜란드 루벤에서 출판되었던 것처럼, 일하고 싶은 만큼 일하고 넉넉하게 생활하며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노동사회의 실현도 이곳 네덜란드에서부터 시작될 것 같다.





<참고문헌>

1. Rudi Wielers, [Part Time Work and Work Norms in the Netherlands], 2011, https://www.rug.nl/staff/r.j.j.wielers/esr.jcr043.full.pdf

2. 정희정, [유연안정성의 나라 네덜란드의 노동시장 유연성과 안정성 실태], 2007

3. 고용노동부, [일-가정 양립을 위한 근로시간 유연화 선도국가의 정책형성과정 및 정책 운영성과에 대한 연구], 2017

4. DutchNews.nl, 2017-01-31, [Dutch women work part-time even in their 20s with no kids]

5. 오마이뉴스, 2013-06-05, [작년에 갔던 '노동시장 유연화' 죽지도 않고 또 왔네?]

6. Jelle Visser et al, [The regulation of part-time Employment in the Netherlands], https://pure.uva.nl/ws/files/4028002/143586_107_parttime_for_silvana.pdf

7. Arjan B.Keizer, [Non-regular Employment in the Netherlands], https://www.jil.go.jp/english/reports/documents/jilpt-reports/no.10_netherlamds.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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