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세자와 시민을 위한 과학 - 과학상점 Wetenschapswinkel
과학/공학은 발전한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전공자도 생명과학의 아주 작은 갈래조차 그 발전 속도를 따라가기 쉽지 않고, 변화의 폭 또한 점점 급격해지고 있다. 과학의 영역은 앞으로, 앞으로 쭉쭉 달려나가는데 점점 많은 사람들이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처음에는 페이스북이나 카카오톡을 익숙하게 다루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 다음에는 하루가 다르게 자동화되어가는 생산 현장에서 새로운 역할을 찾지 못한 노동자들이, 이 숨쉴 틈 없는 달리기에서 점점 지쳐 나가떨어지고 있는 것 같다.
과학/공학의 발전은 단순히 사람들을 어느 방향으로 달려가게 하는 데에만 그치고 있지 않다. 우리는 음악을 작곡하고, 그림을 그리며, 바둑이나 스타크래프트를 능숙하게 해내는 인공지능을 바라보며 '난 뭐지?' 라는 질문에 빠진다. 인간만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인간만의 영역이 아니게 된다면, 인간은 무엇으로 정의될 수 있을까? 우리 유전자가 후손에게 물려줄 만큼의 가치가 있나? 나 하나쯤 어떻게 된다고 세상이 달라지나? 이 거대한 세계에서 우리의 존재는 과연 무엇일까? 그런 질문을 품은 사람들에게, 그런 질문을 품게 만든 과학은 과연 친절한가. 그런데, 과학이 이렇게 빠르게 발전하는 거, 인류에게 좋은 걸까? 이렇게 물으면, 혹자는 과학이라는 학문이 꼭 누군가를 위해서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냐고, 친절해야만 하는 것이냐고 되묻기도 한다.
그러나, 독일의 철학자 막스 베버(Max Weber)가 그의 저서인 <직업으로서의 학문>에서 설명했 듯, 현대 문명에서 과학(학문)은 더 이상 참된 진리를 향한 순수한 배움의 길이 아니다. 그는 오늘날 과학은 전문적으로 행해지는 '훈련'을 통해 얻어지는 직업에 가깝고, 참된 진리나 현인들의 성찰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화폐에 의해 모든 것이 '가치'로 계산되는 시대에 돈이 되는 것만 살아남는다는 것은 지식이나 예술, 자연 세게에서도 점차 타당한 명제가 되고 있다. 돈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값어치를 화폐로 입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공학만큼 그 존재 이유를 입증할 책임이 무거운 분야가 많지 않다. 한국의 사례만 살펴보아도, 지난 해(2018년) R&D 투자규모 세계 5위, GDP 대비로는 세계 1위 규모의 자금이 과학/공학으로 흘러들어 갔다. 세금만 20조원이 매년 투입되고 있는 '돈 먹는 하마'가 바로 과학/공학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사회와 납세자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오늘날의 이공계는 그 환원 방식에 대한 고민이 충분하지 않았던 듯 하다. 지난 해 한국 이공계를 뜨겁게 달궜던 WASET 가짜논문 사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공계 연구는 '졸업, 채용, 승진을 위한 요건'이나 '실적' 그 자체에 가까워졌고 학술지를 발행하는 논문 업체들은 연구 성과를 게재해주고 막대한 이익을 남기고 있다. 과학자는 세금으로 진행된 연구 성과를 학술지에 게재 요청하고, 학술지 게재를 위해 비용을 지불해야 하며, 다른 연구자의 연구 성과를 무료에 가까운 헐값을 받고 정성껏 검토해야 한다. 그리고 납세자는? 학술지를 구독하기 위해 별도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그 연구 결과가 정말 납세자가 '필요로 하는 지식'일 가능성은 어떨까? 그들에게 누구도 필요성을 물어 보지 않았으므로, 필요로 하는 지식일 가능성도 높지 않을 것이다.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 활성화된 과학상점(Wetenschapwinkel, Science shop)은 지역 주민이나 관련 단체로부터 과학 기술에 대한 도움을 요청받으면, 주로 대학의 연구진이 이에 대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간이다. 교수와 일부 학생들이 연구실 앞에 조그만 상자를 설치해, 시민들이 직접 연구를 의뢰할 수 있게 하면서 시작되었으며 1980년대 이후로는 교육부가 정책적으로 지원하여 하나의 제도로 자리잡게 되었다.
과학상점의 특징은, 일반적인 연구 활동이 연구자의 학문적 호기심이나 기업의 상업적인 욕구에서만 비롯되는 것과 달리 일반 시민의 관심을 반영하고,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점이다. 연구 활동을 통해 사회적인 요구와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하려 한다는 점에서, 과학상점은 과학 연구의 열매를 사회와 나누고 있다. 많은 과학자들이 납세자의 세금으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는 만큼, 공공성을 강화하는 데 힘 쓴 결과다.
가령, 북해 입구에 자리한 흐로닝언 주의 과학상점에서 진행된 연구들을 살펴보면 '북해에서의 선박 평형수 위험평가(2012)', 'Eems-Dollard 강의 수질관리(2012)', '흐로닝언 주의 갯벌 생태계 복원 연구(2017)' 등이 있다. 주제를 살펴 보면, 인류의 비밀을 탐구한다거나 지식의 지평을 넓히는 최전선의 연구가 아니라는 이유로 '별로 대단한 연구가 아니잖아?'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같이 지역 사회에 꼭 필요한 지식들이고, 훈련된 과학자의 기여가 반드시 필요한 영역이라는 점에서 '과학상점(Wetenschapswinkel)' 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다.
국비, 혹은 대학 자체 연구비로 운영되는 과학상점에 시민들이 자유롭게 궁금한 질문이나, 지역사회에 필요한 연구를 부탁하면 과학상점은 대학의 학사-석사 과정 학생들과 지도교수를 배정하여 연구를 진행한다. 학교에서는 최근 한국에서도 이슈가 되고 있는 대학과 도시의 상생 발전(Univer + City)을 꾀할 수 있고, 학생들에게는 졸업논문, 학점 혹은 장학금의 기회를 제공해 참여를 이끌어내고 있다. 연구 성과들이 OPEN ACCESS로 제공되어, 일반 시민들이 구독료 없이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지역사회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는 연구를 하는 만큼 학생들의 참여도나 만족도도 높다.
과학 상점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학교와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 에인트호벤, 옌스헤데, 흐로닝언, 틸부르, 와그닝언에 있고 벨기에 앤트워프, 브뤼셀, 루방 등지에 설립되어 있으며 각각 특화된 연구분야를 보유하고 있다. 에인트호벤은 건축과 환경, 흐로닝언은 생태/지속 가능한 에너지개발 등에 특화되어 있다. 과학상점 외에도, 네덜란드 과학자들은 대학 차원에서 지역 주민들과 과학을 함께 향유하기 위해 운영하는 여러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스타 과학자 개개인의 목적을 위한 과학 대중화가 아니라, 체계적으로 과학 연구의 산물을 나누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동력을 제공하는 기반으로 기능하고 있다.
과학/공학은 거대한 산업이자 시스템으로 자리 잡았다. 과학자는 논문을 내지 못하면 도태되며(Publish or Perish), 논문을 내기 위해서는 실력뿐만 아니라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졸업을 위해서, 혹은 과학계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무수히 많은 논문이 필요하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넓히는 지식의 경계가 활용되고 공유되는 방식에 대한 고민 없이 연구성과를 위한 연구에 매몰되어 있지만, 변화는 이미 일어나고 있다. 한국에도 변화를 꿈꾸는 과학자들이 있다.
<참고문헌>
1. 네덜란드 Wetenschapswinkel 협의회(http://www.wetenschapswinkels.nl/wetenschapswinkels-en-kennispunten/)
2. Wetenschapswinkel groningen 2017 Jaaroverzicht(연례보고서)(https://www.rug.nl/society-business/science-shops/over-de-wetenschapswinkels/jaarberichten/wwc31.pdf)
3. 송성수, 김병윤 [네덜란드 과학문화활동의 지형도] 과학기술정책연구원,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