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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곰돌이 Jun 14. 2018

사형수의 미래
:집행보다 먼, 유예보다 가까운

16화. 인권과 생물학, 그리고 사형제도

지난 2월, 여중생 딸의 친구를 추행한 뒤 살해하고 사체를 유기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어금니 아빠' 이영학(36)이 1심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가석방이나 사면을 제외한 절대적 종신형이 없는 상태에서 무기징역은 사형을 대체하기 어렵다."는 것이 판결 이유였다.[1] 흥미로운 사실은, 뉴스를 바라보는 시민들과 재판관, 심지어는 이영학 씨 본인도 '사형수 이영학'의 형이 집행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구도 '사형수 이영학'의 형이 집행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20년간 사형이 집행되지 않은, '사실상 사형 폐지국'이라는 한국의 속사정에 있다. 이번 청와대의 헌법 개정안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생명권이라는 인권을 명시했고 사형이라는 조항이 사라졌다. 개헌 특위는 "사형제 폐지는 국제적 인권 수준에 발맞추기 위해 헌법 제정권자의 결단으로 헌법에 명시한다." 고 밝혔다. 이러한 추세로 볼 때,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사형제 폐지'는 인권의식 향상에 따른 되돌릴 수 없는 흐름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는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부분이 있다.


'국제적 인권 수준'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걸린다. 


왜냐 하면, 이것은 서구사회에 의해 주도되는 인권 담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인권담론에서는 인권(human rights)을 '천부인권'이라 칭하여 인간이 탄생하는 순간부터 갖게 되는 '하늘 이 주신 권리'로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범죄자에게도 지켜져야 할 인권이 있고, 연쇄살인범이나 강간범, 전쟁범죄자와 같은 흉악범에게도 숭고한 생명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몇몇 인권론자들은 로크의 사회계약론에서도 "국민은 국가에 근본적인 생명의 권리를 위임하지 않았다."라고 언급된 점을 들어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무조건적으로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품게 된다. 


그런 사람들까지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사실, 인권을 논함에 있어 '인간'의 테두리를 어디까지 할 것이냐에 대한 이야기는 문명의 탄생 이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다뤄져 왔다. 그리스 시대에는 그리스인 가운데 성인 남성에게만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부여하였고,  1950 ~ 1970년대에는 '인간'이라는 테두리가 일반 노동자, 여성, 흑인에게로 조금씩 확장되어 왔다. 1980 ~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제는 장애인에 대한 인권, 성 소수자에 대한 인권까지 '인간'의 테두리가 포함할 수 있는 시대에 이르렀다. 이 테두리가 정말로 세계 전역에서 지켜지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지금까지의 변화로 볼 때, '인간'의 범주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세월을 거치면서 수도 없이 변해왔던 유동적인 개념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가장 보편적으로 이야기되는 <세계인권선언>마저도 불과 60여년 전에, 서구권 국가들의 주도로 제정되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IQ나 감정, 성찰 능력과 같이 흔히 '인간만의 특징'으로 일컬어지는 것들은  IQ90의 범고래나, IQ120의 보노보, 침팬지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음이 최근 생물학계를 통해 보고되고 있다.[1][2] 몇몇 사람들은 인간 고유의 유전자를 인간의 특성으로 주장하기도 하지만, 인간들 사이에서도 저마다 다른 유전자를 갖고 있기 때문에 어떤 유전자를 인간의 기준으로 삼을 것인지 정하기 어렵다. 또한 인간과 유전자가 전체의 1.3%밖에 차이 나지 않는 보노보, 침팬지를 인간으로 볼 것인지, 아니라고 볼 것인지 그 기준도 명확하게 정의될 수 없다. '인간처럼 생겼다'라는 개념을 정의할 수도 없다(불과 40년 전까지만 해도 흑인종과 황인종이 당했던 일을 떠올려 보자).  '인간의 정의'를 묻는 질문에 쉽사리 답하지 못하는 현상이 담고 있는 핵심은, 우리가 '인간'에 대해 매우 편협하게(혹은 종교에 기반하여) 관습적으로 정의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 그리고 '인권'이란, 사회 안에서 맺어진 계약의 산물이다.


만약 인권이 하늘에서 선물 받은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인간이라는 생물이 진화의 산물이고, 수많은 동물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면 인권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인간을 자칭한 몇몇 호모 사피엔스 무리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비슷한 언어를 사용하고 부락을 형성하면서 특정한 사회와 문화 속에서 적절한 교육을 받고, 구성원으로서의 책임을 다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사람들 사이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체결한 묵언의 계약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회'의 범위가 넓어지고 복잡해지면서 이민자, 여성, 노인과 어린아이, 장애인과 동물을 포함해 지구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 사이에 계약이 체결되고, 이에 따라 생명과 자유를 포함한 권리가 보호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계약은, 책임만큼 권리를 부여한다.

이렇듯 인권이 사회 속에서 관계를 통해 보장되는 것이라면 그에 따른 책임도 요구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존재해 온 계약의 굴레를 떠안은 이상, 책임을 충실히 이행해야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고, 보장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어떤 사회 구성원이 연쇄살인이나 흉악범죄를 저질렀을 때, 그로 인해 '무형(無形)의 책임'이 성실히 이행되지 않았다면 계약이 유지될 수 없을 것이고, '계약 파기자'의 생명권이 존중받기 어려울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럼 이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흉악범은, 그들이 계약되어 있는 사회에서 
구성원으로서 책임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들은 향후에라도 그들의 계약을 이행할 가능성이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피해자를 포함한 시민들의 세금으로 그들의 인권이 보호되어야 하는지 우리는 새로운 고민을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1].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33011.html

[2]. Hurley, Susan Ed, and Matthew Ed Nudds. Rational animals?. Oxford University Press, 2006.

[3]. Heyes, Cecilia M. "Reflections on self-recognition in primates." Animal Behaviour 47.4 (1994): 909-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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