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쓰기
유료 독서모임인 트레바리의 '덕덕'이라는 이름의 토론 모임에 참여 중이다. 평소엔 브랜딩이나 AI 같은 배우고 싶었던 실용적 지식에 닿아있는 클럽을 선택했었는데, 이번엔 다른 선택을 하고 싶었다.
덕덕을 선택한 이유는 그곳이 나와 반대되는 '덕질'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나의 대상을 향해 끝도 없는 '디깅: 깊이 파들어가기'을 하는 사람들의 세계가 궁금했다.
나는 디깅에 소질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디깅'을 하는 친구를 보면 늘 흥미로운 포인트들이 있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면...
1. N차 관람
영화를 예로 들자면, 영화관 환경을 바꾸면서 보는 것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같은 환경에서도 여러 번 보는 경우는 달랐다. '덕질'에 소질이 있는 친구는 영화 하나를 본 뒤 집으로 돌아가 관련 '해설' 콘텐츠를 여러 개 찾아 해석을 꼼꼼하게 찾아본 뒤, 그 장면과 요소들의 의미를 하나하나 파악하고 N차 상영을 했다.
나는 영화를 보며 '하나하나의 장면'이 의미하는 것에 그리 집중하지 않는다. 감독이 하나의 장면에 숨겨놓은 의도, 그리고 그것을 위한 장치들이 멋지고 대단하다고 느끼지만, 그렇다고 큰 관심을 갖지 않는다. 내가 중시하는 것은 영화를 볼 때 '내가 무엇을 느끼는가? 생각하는가?'인데, 내 경우엔 한 번 정도의 상영으로 영화에 대한 해석, 작가의 의도 등을 생각하고 느끼기에 (내가 바라는 수준의 정도로!)충분하다. 따라서 1회 이상 동일한 콘텐츠를 보지 않을뿐더러, 두 번 본다고 느끼는 게 크게 달라지는 걸 경험한 적도 드물다.
2. 세계관 그 자체를 소비하는 것
마블 스튜디오의 히어로 영화가 나오면, 영화를 본 뒤 해당 세계관에 관련된 영화와 주변 콘텐츠를 찾아보고, 그 외에도 피규어나, 영화 촬영지나, 그 외의 관련된 모든 온/오프 콘텐츠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것이 신기했다.
내 경우에는 확장이 잘 안 된다. 사실 마블 스튜디오의 영화들도, 과거엔 아이언맨 1을 안 봐도 3편을 봐도 괜찮았다. '세계관'이라는 시각으로 영화를 보지 않았고, 그냥 한 편이 얼마나 완성도 있게 만들어졌나? 만 중시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마블의 세계관을 꾀고 있는 친구를 만나, 은은하고도 치밀한 교육을 받으며 마블세계관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피규어 같은 것도 흥미를 가지게는 되었으나- 단지 '흥미'이지 그게 '덕질'로 확장되지는 않았다.
3. 좋아하면 끝까지 해보는 것
나와 함께 수영을 즐기던 친구가 있었다. 그는 여러 개의 수모를 사모으고, 수영복 브랜드를 줄줄이 꾀고, 실제로 여러 개의 수영복을 구매해서 입어보고, 육상과 물속에서의 훈련을 하고, 아마추어 대회도 나가고, 수영장 투어를 하는 것도 좋아했다.
나는 '수영을 하는 그 자체'가 좋을 뿐이었다. 물속에서 내가 느끼는 감촉, 하나하나 영법을 배워 익히는 감각. 건강을 위해 시작했기 때문에, 수영을 통해 매일 상쾌하게 하루를 시작하고 또 일상의 건강이 잘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 그런 것들이 중요했다. 그 외의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매일 수영할 수 있는 마음에 드는 센터가 하나쯤 있으면 되고, 내가 목표한 '건강을 위한 수영하기'에 부합하는 정도에서 만족했다. 수모나 수영복, 다양한 장비보다 중요한 건 '매일 꾸준히 수영할 수 있는 루틴'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만약, '도구나 의상'에 더 관심을 가졌다면, 나는 그 '관심'이 족쇄처럼 느껴져 수영을 더 빨리 그만뒀을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많은 면에서 우리는 달랐다. 하지만 그런 차이를 더 길게 나열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나는 그런 친구들이 때론 이해되지 않았고, 또 때론 부러웠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주변 사람에게 영업하듯 추천했고, 나는 보통 내 안에서 이유가 생기지 않으면 관심이나 에너지를 쓰지 않는 타입이기에 그들의 추천에 응하기 어려웠다.
‘더 깊이 좋아하지 못하는 나’를 보며 아쉬워한 적도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내 스타일은 애초에 ‘내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목표한 만큼’만 에너지를 쓰는 방식이었다. 디깅에 대해 나는 늘 부러움과 회의, 두 가지 시선을 함께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두 감정을 모두 품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그동안은 자각하지 못했다.
덕덕이라는 클럽에서 좋아하는 대상을 정말 깊게 좋아하고, 그걸 신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다시 또 양가감정을 느꼈다. '부러움과 궁금증' 그리고 이제야말로 '다양한걸 얕게 좋아하기와 좁은 영역의 딥다이브'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런데 사실 이걸 지금 당장 결론내기리는 어려울 것 같다.
다만, 나도 하나쯤은 '파보는 시도'를 다시 시작해 보기로 했다. 바로 '글쓰기'다. '콘텐츠 하나'는 깊이 팔 수 없지만, 잘하고 싶은 '쓰기'의 영역이라면 시간과 에너지를 좀 더 많이 투여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넓은 관심사에 대해 꾸준히 써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저는 쓰기에 딥다이브하고 있어요’라고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