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너무 싫어, 그런데...

두 번째 쓰기

by 박고래

오늘 마케터 모임이 있었다. 그리고 참석자 중 한 분이 유독 직장, 커리어와 관련한 고민이 많으셨다. 함께 모인 사람들은 절로 그 분의 이야기를 듣고, 피드백이나 도움 될 만한 이야기를 하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한 시간 동안 대화의 패턴을 보니 우리의 대화는 이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A : 아 저는, 대표님이랑 진짜 많이 싸우거든요. 자꾸 업무 영역을 침범하시고, 심하게 일을 시키셔서....

B : 그렇다면 정확하게 '업무 영업'에 대해 조율하고, 확장이 필요하면 '필요한 조치를 요청해 보세요."

A : 아, 그렇긴 한데...


A : 그리고 또 제가 회사에서 맡은 팀이 진짜 많아서, 쉴 틈이 없거든요. 저는 설이며 추석에도 다 일했어요..

C : 쉼도 중요한데, 그렇게나 일이 많으시면 팀원을 뽑아달라고 요청하시거나 업무량을 조율해 보세요.

A : 아, 근데 또 제가 회사 사정을 이해하다 보니...


A가 꺼내놓는 주제는 조직 구조, 업무 방식, 팀원과의 관계, 상사와의 관계, 자원 배분 방식 등 아주 다양했다. 그 많은 주제에 대해 A는 하나같이 '어려움'을 호소했다. 그리고 '내가 바라는 것은 이게 아닌데...'라고 말했다. 따라서 주변인들은 '그럼 바라는 방향을 위해 이걸 해봐.'하고 권유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오는 첫마디는 '근데'였다.


처음엔 그 대열에 끼여서 열심히 A에게 내 경험을 나눠주던 나는 이 '근데'로 시작하는 답변이 반복되자 자세를 고쳤잡았다. 책상 앞으로 한껏 뻗었던 몸을 뒤로 젖히고 조금 관조적 태도로 그 대화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A는 지금의 상황에서 빠져나올 생각이 없다는 것. 아니 적은 확률로 탈출을 꿈꿔도, 끝내 그 회사에 남을 결심을 한 것은 A 그 자신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어쩌면 그냥 '힘들고, 나 이렇게나 최선을 다하고 있다.'를 어필하고 싶었던 것 같다. 번아웃이 올만큼 힘들지만, 그래도 설립 초기부터 함께 키워온 회사니, 마치 '내 회사, 내 것'으로 인식하는 듯했다.


한 자리에 모인 분들은 모두 A가 가진 문제를 먼저 겪은 자신의 사례를 최대한 자세히 공유하며, A가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도록 유도했다. 또는 새로운 방식의 개선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말들은 0.5mm쯤 흡수되는 듯하면, 5cm쯤 튕겨나갔다.


'싫지만 싫어하지 않는' A의 모순된 태도가 불편한 한편, 내 과거가 떠오르기도 했다. 나 역시나 마치 '내 것'처럼 좋아하는 회사가 있었고, 꽤 공들여 오래 관리해 온 체력과 에너지를 짧은 기간동안 다 축낼 만큼 열정을 다해 뛰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나도 주위 사람들과 "너무 실어- 근데"의 대화를 했었다. 그 시절 나는 나를 갉아먹는 조직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실은 그 사슬을 스스로 끊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상황을 뒤바꾼 것은 결국 조직과 나를 분리해서 보는 경험을 한 뒤였다. '이 회사는 언제든 나를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겨우, '쓰린 마음을 뒤로하고' 헤어짐을 결심했다. 그러니까 그 결심의 버튼은 '나 스스로 겪은 배신의 경험'이었다.


결국, 자기가 겪어봐야 할 만큼 겪어야 끝난다.


잔인한 말이지만 정말 그런 것 같다. 어떤 일들은 마치 내 정체성에 닿아 있어서, 누가 말을 해 줘도 그게 '해로움'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그 해로움이 '나 스스로의 존재'를 파먹기 시작할 때, 나를 무너뜨려 일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주체가 될 수도 있음을 잔인하리만큼 정확히 확인할 때, 그제야 결심할 수 있다. 헤어지겠다고.


그런데 말이다. 웃기게도 이 '너무 싫어- 근데'의 패턴은 '일'을 이야기할 때만 쓰는 말이 아니다. 좋아하는 친구, 연인, 그룹 등 여러 가지 상황에서 우리는 이 모순된 말을 남발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한편, 나의 정체성을 더 공고히 다진다. 당신에 제목에 이끌려 지금 이 글을 읽는다면, 아마 당신도 한 번쯤 '너무 싫어, 그런데' 화법을 구사해 봤을 것이다. 그러니 요즘의 자신은 이런 말 습관을 가지지 않았는지 돌아보길 바란다. 그리고 요즘 반복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면 "너무 싫어" 다음 나오는 "근데"를 빼고 주변인의 말을 경청하고, 또 경청해 보기를 바란다.


그렇게 답을 정해두고 듣지 않았는데도,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고 싶다면 당신은 좀 더 겪어야 하는 것일 것이다. 한편 마음이 움직였다면, 당신은 서서히 변화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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