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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에 처음 죽순을 본 날

스무 번째 쓰기

by 박고래

이번 주말에는 내내 게으름을 피웠다. 일요일 오전 요가 수련을 빼면, 청소하고, OTT를 보고, 평소보다 조금 더 길게 잠을 잤다. 지난 금요일 저녁 체한 상태로 요가 수업을 밀어붙여한 탓인지, 컨디션이 다소 떨어진 상태였다. 덕분에 크게 기쁜 일도, 에너지를 쓸 일도 없이 고요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오늘 저녁에는 마트에 다녀왔다. 거기서 고요했던 주말 이틀을 통틀어 가장 나를 활력 돋게 하는 것을 만났다. 바로 ‘햇 죽순’을 만난 일이었다.


식료품 매대를 지날 때였다. 처음 보는, 아이의 팔뚝 정도 되는 굵기의 식재료가 놓여있는 게 보였다. 뭔가 싶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마치 옥수수 껍질 같은 재질의 보랏빛+갈색을 섞은 듯한 색의 잎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가장 끝부분은 옥수수처럼 수염은 없지만, 위로 갈수록 얇아지고 뾰족해지는 모양이 옥수수를 연상케 했다.


나는 죽순 나물을 좋아한다. 하지만 시장이며, 마트에서 본 죽순은 늘 작고, 짙은 아이보리 빛을 띠고 있었고, 이미 집에서 바로 요리할 수 있도록 1차 손질이 끝난 상태였다. 한 번도 죽순을 “땅에 뿌리를 박고 그대로 자란 채의 모습”으로 본 적이 없었다. 담양 죽녹원이나, 그 외 대나무가 많이 자라는 곳에 갈 때면 시도 때도 없이 죽순을 보겠다고 대나무 주위를 살피곤 했는데, 한 번도 ‘순’처럼 생긴 걸 본 적은 없었다.


마트에서 ‘햇 죽순’을 본 나는 그게 너무 신기해서, 예정에도 없던 죽순을 한 줄기 사 왔다. 한 줄기는 2천2백 원쯤 했는데, 크기는 옥수수보다도 컸지만 들어보면 같은 크기의 옥수수 한 개보다 더 가벼웠다. 대나무처럼 속이 중간중간 비어있는 탓이었다. 손에 들자마자 양이 적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요리에 대한 욕구보다는 궁금증에 구매한 것이라 딱 한 대만 구매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난데없는 죽순 손질이 시작되었다. 겹겹이 덮인 껍질을 들추면 연노란색의 살짝 단단한 속이 나오는데, 칼로 이 단면을 자르면 ‘아삭’하는 단단한 섬유질의 느낌이 났다. 


한 블로그에서는 껍질을 하나하나 까지 말고, 가장 아래 밑동의 단단한 부분을 자른 뒤 죽순의 한가운데를 칼로 가르면 가장 쉽게 해체할 수 있다는 팁이 적혀있었다. 그렇게 껍질 아래의 속만 들어낸 뒤에는 쌀뜨물과 소금, 식초를 넣고 약 50분 정도 약한 불에 끓이라고 안내되어 있었다. 내가 시장에서 본 물속에 담겨있었던 아이보리색 죽순은 바로 이렇게 손질된 상태였던 것이다. 삶은 뒤에는 다시 하루 정도 찬 물에 담가 죽순에 남아있는 아린 맛을 제거해야 먹을 수 있는 상태가 된다고 했다.


나는 쌀뜨물이 없어서, 집에 있는 오트밀로 쌀뜰물을 만들고(정확히 쌀뜰물은 없어서, 응용버전으로 활용했다.), 거기 소금과 식초를 넣어 50분 정도 삶았다. 그 뒤에 찬물에 죽순을 넣는데 한 대의 양이 너무 적어서, 그걸 보니 반성의 마음이 우러났다.


재래시장에 가면 손질된 죽순대를 파시는 분들이 보통, 두~세 개의 크고 작은 죽순을 놓고 5천 원 정도의 가격을 받으셨었다. 나는 그게 늘 적은 양이라 생각했고, 엄마랑 함께 갈 때는 조금 더 주세요~하며 조르기도 했었다. 그런데 내가 직접 사서 원재료의 가격을 알게 되고, 손질 과정을 겪어보니- 그 상인 분들이 이익을 많이 취하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순을 좋아하지만 원래료를 본 것은 살면서 처음이었다. 나는 비교적 식재료에 관심이 있는 편이고, 때로는 요리하는 걸 좋아하기도 하지만 바쁜 시기엔 식재료를 사고, 음식하는데 시간을 내지 않는다. 돌아보면 그런 시기엔 음식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원래 어떤 모습이었는지 까지는 잘 생각하지 못했다.


손질 전의 죽순을 내 눈으로 보고, 칼로 직접 껍질을 잘라 그 속의 알맹이가 얼마나 작은지 눈으로 보고, 다시 그걸 오래 삶고, 물에 담가두는 작업을 하고서야 ‘아, 귀한 음식이구나’ 체감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식재료의 ‘가치’에 대해서도 깨달았다.


이런 과정이 없었다면, 내게 죽순은 ‘비용 대비 너무 적은 양의 식재료’라는 단순한 공식으로만 판단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수고를 알기에, 조금 더 제 값을 치른다는 생각으로 이 식재료를 구매하게 될 것 같다. ‘귀하게 생각하고 먹어야 하는 것’또한 당연하고 말이다.


요즘은 부쩍 외식이 늘고, 회사 스낵바에 놓인 과자도 큰 경계 없이 먹고 있었다. 내가 경계한 것은 ‘살이 찔까?’하는 걱정일 뿐,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영양을 담고 있는가? 하는 식재료의 본질적 문제가 아니었다. 한식은 좀 낫지만, 식재료 원래의 모양에서 한참 떨어진 가공식품들을 보며 ‘원재료’나 ‘영양’을 쉽게 생각하기는 어렵다.


햇 죽순을 만나 손질을 하며 떠올린 이런저런 생각 끝에 다다른 결론은, 아무리 귀찮아도 식재료를 사고, 그것이 어떻게 조리되는지의 과정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건강’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단지 ‘먹는다’는 행위 그 자체만으로는 건강을 지킬 수 있는 섬세한 감각을 기르기 어려운 것 같다.


지구 온난화로 원재료를 재배하기는 더 어렵고, 과도하게 가공된 식품의 현혹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도 어렵지만, 그럴 때 일 수록 ‘본질’에 가까운 식재료 그 자체에 관심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내 건강도 지키고, 또 마땅히 가져야 할 자연과, 그 연관 산업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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