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만큼이나 대단했던 애니, '진격의 거인'

스물여섯 번째 쓰기

by 박고래


약 3주에 걸쳐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을 정주행했다. 이 애니메이션의 첫 시즌은 2013년에 방영됐고, 지금은 2025년. 나는 거의 12년 동안 이 작품을 보지 않았던 셈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볼 생각이 없었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이유는 단순했다. 시즌 1 방영 당시, 우연히 한 편을 봤는데,

징그러운 거인의 비주얼

사람을 씹어먹는 잔인한 장면

이 두 가지 요소 때문에 이 애니메이션에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진격의 거인』을 기억 저편에 묻어두고 살았다.


그러는 사이 이 작품은 약 10년에 걸쳐 시즌 4까지 완결되었고, 단순히 결말만 본 것이 아니라 일본 만화 역사에서 손꼽히는 영향력을 남겼다. 원작 만화는 전 세계적으로 1억 4천만 부 이상 판매되어 역대급 판매고를 기록했다고 한다.


올해 트레바리에서 만난 어떤 분이 『진격의 거인』을 좋아한다고 했고, 3월에는 팀의 인턴이 극장판 《더 라스트 어택》을 보겠다며 연차를 쓰는 일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왜 그 비주얼 별로고, 사람 잡아먹는 애니를 좋아해요?”라고 물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았다.

“세계관이 정말 대단해요.”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이유가 ‘세계관’ 때문이라니. 내가 아는 강력한 세계관은 마블 유니버스 정도였고, 사실 그조차도 캐릭터의 개별 서사나 액션, 스케일에 더 끌렸던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점점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진격거』의 세계관이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것일까?


그 호기심을 풀 기회가 뜻밖의 날 찾아왔다. 체기가 심해 하루종일 누워 있던 토요일 오후, 쿠팡플레이에서 『진격의 거인』을 발견했고, 아무 생각 없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 사실 처음 몇 편은 그저 볼 게 없어서 본 것이었는데, 5화를 넘기며부터는 이야기가 궁금해 더 이상 멈출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그토록 사람들이 말하던 “세계관이 대단하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시즌 1은 거대한 벽 안에 갇혀 살아가는 인류와, 그들을 위협하는 거인과의 대결 구도로 시작된다. 이 '인류 vs 괴생명체'라는 설정은 사실 흔하디흔한 이야기다. 외계인이 침공하는 헐리우드 영화에서도 익숙한 구도다. 그런데 『진격의 거인』이 특별한 이유는 단순한 ‘전투’ 때문이 아니었다.


애니를 보며 처음 떠오른 것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였다. 그리고 시즌이 전개될수록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함께 겹쳐졌다.『사피엔스』는 인류가 어떻게 진화해 문명을 만들고, 국가를 형성해왔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기득권과 피지배층, 체제에 순응하는 대중의 권력 구조까지도 잘 보여주는데, 『진격의 거인』의 이야기 속에는 이 모든 구조가 아주 치밀하게 반영되어 있었다.


시리즈 후반부에 접어들며 주인공들이 ‘거인’의 정체를 알게 되고, 벽 바깥의 세계를 마주한 이후부터는 전투의 구도가 ‘인간 vs 인간’으로 전환된다. 이 지점부터는 『사피엔스』뿐만 아니라 진화론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각국과 민족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또 ‘우리 편’을 보호하기 위해 행하는 잔혹한 행위들. ‘대의’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수백 명이 희생되고, 내가 응원했던 주인공조차 ‘내 사람’을 위해 살육을 택하거나, 반대로 인류 전체를 위해 ‘내 사람’을 희생시킨다.


이 흐름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인간은 우연의 산물로 생겨났고, 개체 수가 늘며 무리를 이루고, 그 안에서 기준을 만들어 권력이 나뉘고, 기득권과 비기득권의 끊임없는 대립이 반복된다. 『진격의 거인』은 이 모든 인간의 역사를 ‘거인’이라는 또 다른 우연의 존재를 통해 치밀하게 그려낸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와도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이 애니메이션을 보며 나는 오래전 고민했던 개념들—인간의 모순, 적자생존, 민족주의, 공리주의, 공존공영—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먹고사는 일에 치여 언젠가부터 잊고 살던 것들이었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다. 왜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런 철학적 가치에 대해 더 이상 진지하게 논의하지 않는걸까?


생각해보면, 인류가 지금 이토록 평화로운 시대에 살 수 있는 건 이러한 사회철학적 가치와 논의가 지속되어 왔기 때문일 텐데. 요즘은 '돈'이라는 수단이 절대적인 목적이 되어버렸고, 사회를 떠받들던 중요한 가치들은 점점 빛을 잃고 있는 것 같다.


『진격의 거인』의 마지막은 수많은 인류가 사라지는 참상으로 끝이 난다. 물론, 전개는 ‘애니메이션답게’ 다소 극적이지만, 나는 생각했다. 과연 현실의 인간들은 이와 정말 다를까? 이렇게 깊은 통찰을 담은 애니메이션이 사랑받고 있다면,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는 알게 모르게 ‘철학’의 부재를 갈급하게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애니메이션을 추천해 준 팀원이 말했다.
“팀장님, 진격거는 보면 볼수록 새로워요.”
지금 글을 쓰고 보니, 나도 다시 한 번 이 콘텐츠를 정주행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 후엔 ‘정의란 무엇인가’ 같은 철학서적도 함께 읽으며, ‘주식’이나 ‘부동산’ 같은 생존의 지식뿐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에 대한 공부 또한 미루지 말아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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