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일곱 번째 쓰기
신규 유통 채널에 브랜드가 입점하면서, A채널 오픈 시점을 기점으로 매출을 끌어올릴 수 있는 세일즈 마케팅 플랜을 기획하고 있었다.
팀에는 더 시급하고 중요한 업무들이 있었기에, A채널에 대한 마케팅 준비는 인턴 L과 내가 단둘이 맡았다.
처음에는 간단한 사례 조사를 요청했고, 그다음에는 고객의 구매 경로를 파악해 어떤 마케팅 액션이 필요한지 정리해보게 했다. 처음 해보는 업무라 당연히 보완할 점이 많았다. 나는 부족한 부분이 보일 때마다 질문을 던졌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예산이 정해져 있는데, 이 인플루언서가 그 예산 안에서 가장 적절한 선택이라고 판단한 이유는 뭔가요?”
“이 자료를 가지고 상사에게 브리프 한다고 생각해 볼까요? 처음 접하는 사람이 이 내용만 보고 이해할 수 있을까요?”
“소비자 5명의 리뷰가 마케팅 전략을 실행할 근거가 되기에 충분할까요? 왜 그렇게 판단했나요?”
이 질문들은 단순한 지적이 아니라, 논리적 사고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L은 이 과정에서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를 궁금해했고, 피드백에 대해 방어적이지 않았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질문했고, 납득이 되면 “알겠습니다”라고 답하며 수정과 보완 작업을 이어갔다.
놀라웠던 건, 본인이 ‘팩트에 기반한 확신’을 가진 경우에는 조심스럽지만 정확하게 자신의 의견을 설명할 줄도 알았다는 점이다.
이런 태도는 우리 팀의 3년 차 마케터 H와 매우 대조적이다.
H는 내가 “이 부분은 왜 빠져있죠?”라고 물으면, “그건 상식이잖아요”라는 식의 반응을 하며 피드백을 피하려 들곤 했다. 객관적 근거보다는 ‘당연한 걸 왜 묻냐’는 태도. 그것이 그를 성장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처럼 느껴졌다.
오늘은 A채널 플랜을 위한 세 번째 미팅이었다.
사실 처음 이 업무를 시작했을 때, L의 역할은 자료 준비 정도였다. 그러나 회사의 주요 프로모션, 하반기 전략 안 등 큰 업무들이 연달아 이어지며, 내가 A채널을 신속히 마무리 짓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프레젠테이션 장표 구성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생각보다 어렵죠? 사실 3년 차 매니저도 이거 하라고 하면 부담스러워해요.
수·목요일 연차시니, 오늘 안에 보완 가능한 부분까지만 해주세요. 나머지는 제가 마무리할게요.”
그러자 L은 잠시 망설이다 이렇게 말했다.
“오… 팀장님, 제가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이 꽤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 업무는 L이 처음 해보는 일이었고, 매번 미팅이 끝날 때마다 수정과 추가 요청이 생겨났다. 그런데도 그는 늘 “내가 이걸 몰랐구나”라는 깨달음과 “그래도 한번 해보자”는 태도를 유지했다.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했다.
“연휴 중에 딱히 할 게 없었는데, 제가 좀 더 생각해 보고 보내드려도 될까요?”
단순히 주어진 숙제를 하는 사람의 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L은 마치 자신을 실험해 보려는 사람 같았다.
‘이걸 내가 해낼 수 있을까?’를 스스로에게 묻고, 기꺼이 해보겠다는 마음.
솔직히 말해, L이 하루 더 고민한다고 해서 내가 보완할 필요가 없어지진 않는다. 하지만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다. 그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는 “안되면 팀장님이 도와주시겠지”라는 의존이 아니라, “내가 어디까지 해볼 수 있을까?”같은 생각으로 일을 해나가고 있었다.
거창하게 부담을 지지는 않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시험하는 자세를 견지했다. 반면 3년 차 H는 고객 구매 여정을 설계해 보라 하면 늘 되묻는다.
“제가요? 혼자서요?”
그럴 때면 나는 마음속(때론 입 밖으로)으로 되묻는다.
“그럼 누가 더 있지요?”
L처럼 “제가 해볼게요”라고 말하는 사람에겐,
“그럼 일단 쭉 해보시고 주세요. 제가 보완할게요. 걱정 말고 더 해보세요.”라는 격려를 해주고 싶어진다.
직장 생활 10년이 넘으며 하나 확신하게 된 게 있다.
‘몇 년을 일했는가’는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보다는 ‘생각의 방식’과 ‘그 생각을 실행해 본 경험’이 나를 만들어준다.
오늘 L이 “제가 할 수 있어요”라고 말했을 때, 그는 단순히 주어진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성장시키는 사람으로 보였다.
직장이 우리를 책임져주지 않는 시대.
과거의 방식을 답습해서는 더 이상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
그런 시대에 필요한 자세는 ‘주어진 일을 해낸다’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실험해 본다’는 태도가 아닐까. 그 꾸준한 실험이 진짜 경쟁력 있는 나를 만들어주는 지름길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