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 성해나 작가의 [혼모노]를 읽고

마흔 번째 쓰기

by 박고래

책을 다 읽은 뒤 떠오른 단어는 ‘열망’이었다.


그게 옳던 그르던 상관없이 마음속에 이뤄지기를 바라는 하나, 저도 모르게 강렬하게 품었던 그 하나를 ‘옳게’ 또는 ‘이뤄지게’ 만들기 위해 애쓰는 과정과, 그것이 허물어졌을 때 느끼는 무력감, 허무함 같은 것에 대한 이야기로 읽혔다.


좋아하는 영화감독이 촬영 중 배우에게 도를 넘는 요구를 했다는 소문이 아니길, 내가 좋아하는 감독이 그런 사람이 아니길 믿는 맹목적 팬심. 하지만 결국 대중을 향해 고개 숙이는 그를 볼 때의 허무함. (길티클럽 : 호랑이 만지기)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 헤비메탈을 사랑했으나, 시간이 흘러 제각각 추구하는 게 달라지면서 ‘함께 같은 것을 추구하기를, 우리가 믿는 것이 최고이기를 바랐던 믿음’이 허물어지며 느끼는 허탈함. (메탈)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화자)이 바라는 것은 다 저마다 달랐으나, 모두가 ‘열망’하는 것이 있었다는 지점이 같았고, 그것이 허물어지는 장면의 파급은 크레센도(점점크게) 또는 디크레센도(점점작게)의 느낌으로 제각각 달랐다.


어떤 열망은 공감되었고, 어떤 열망은 ‘저렇게까지?’ 싶을 만큼 폭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자신을 훼손하는 지경까지- 그렇게까지 맹목적으로 무언가를 추종하고, 믿고, 바랄 수 있나? 하는 점에 눈이 갔다.


접신하던 신령님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아도 끝끝내 피를 흘리며 칼춤을 추고(혼모노), 내 뜻대로 내 아이의 삶을 디자인하겠다는 목표로 양수가 터진 딸을 끝내 비행기에 태우려는 엄마(잉태기), 인간이라면 이렇게까지 잔혹한 상상을 할 수 있나 싶을 만큼 완벽한 취조실을 만들기 위해 미친 듯 몰두하는 건축학도의 이야기(구의 집)를 보면서는 섬뜩한 느낌마저 들었다.


한편으로는 왜, 자신의 열망이 ‘비뚤어진 무언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못하나? 바로잡지 못하나? 궁금했다. 왜 ‘무언가를 향한 열망’이 너무 크면, 아주 극단적인 일조차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되는 걸까?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되고자 함’ 같은 열망이라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것 이상으로 원함이 있어야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변화시키고, 성장시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열망이 잘 못된 믿음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면 어쩌나? 하고 이 소설을 본 뒤에 돌아보게 되었다. 그게 무엇이든, “절대적으로 옳은 열망은 없다. 늘 재고하는 습관은 필요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한때 뜨겁게 품었던 열망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놓을 수 있는 무언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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