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한 번째 쓰기
겨울이 어떤 계절인가. 밤이 길고 낮이 짧은 계절. 식물이나 대지에 내려쬐는 빛의 양이 줄어들고, 점차 그늘진 면적이 늘어나고 종국에는 새까만 어둠이 사위를 뒤덮는 순간이 길어지는 계절이다. 광합성을 통해 생육하는 식물들은 잎을 떨구고, 바닥에 나뒹구는 바짝 마른 나뭇잎마저 모래먼지처럼 작게 갈려 사라져버린다. 숲 속 동물들은 땅굴을 파고 들어가 움직임을 최소화 한다. 자연의 본성대로 겨울을 나는 방식이다. 움직임을 최소화 하고, 에너지를 아끼며, 활력 없는 시간과 공간 속, 고요 가운데 머무는 것이다.
인간의 겨울은 다르다. 어둠이 깔린 시간이 길어지고, 빛이 짧아져도, 한 낮의 온도계가 마이너스 눈금을 가리켜도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은 동적이다. 빼곡하게 들어찬 사람들을 실어나르는 출퇴근길 지하철이 여느때와 다름없이 운행되고, 사람들은 추위 속에서도 돈을 벌고, 연애를 하고, 스포츠를 즐긴다.
인간도 동물의 한 종일 뿐일진대 식물과 동물이 ‘겨울’에 최소한의 에너지로 사는 것과 반대로 인간은 왕성한 활동을 한다. 이상한 일이다. 산업혁명은 19세기 중후반에 일어났다. 그 전까지는 인간도 계절의 감각으로 살아왔을 테다. 약 백년 남짓한 시간동안 인간의 겨울 체력만 더 진보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매서운 한파에도,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동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에너지는 어디서 온 것일까?
“기억해. 너는 겨울이 오면 우울해지는 사람이라는 걸. 그러니 뭔가를 시작하려면 봄이 좋을거야.”
지근거리에서 8번의 겨울이 오고 가는동안 나를 지켜본 지인은 그렇게 이야기 했다. 11월, 12월 달력을 넘기는 동안 미간의 주름도 더 깊어졌다. 찬란한 설경을 만나는 여행을 계획하고, 운동 센터에 나가고, 크리스마스 같은 특별한 날들도 기념하지만, 그럼에도 겨울이 주고 간 우울의 흔적은 언제나 꼬리표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언제나 나는 겨울의 어둠을 모르는 척했다. 하지만 내 몸은 늘 ‘겨울을 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니 겨울의 우울은 죄가 없고, 겨울의 우울은 자연에 가깝다.
태초의 바다에 살던 아메바가 발이 달린 동물이 되고, 또 그 동물이 두 발로 걷고 도구를 쓰는 동물이 되는 시간 동안 우리에게 각인된 것은 ‘정적 겨울‘이다.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내게 깊이 각인된 것은 ’정적 겨울‘, 그런데 어떻게 나는 동적 겨울을 보내며 살아온 것인가? 하는. 그것은 인위적이고 다소 이상한 현상이다. 몸은 매년 겨울이 되면 의아할 것이다. 분명 쉬어야 하는 계절인데 이 인간은 왜 이렇게 뛰어다니는가. 분명 휴식기가 찾아와야 하는데, 인간들은 어째서 추위를 맞지도, 긴 어둠을 맞지도 않은 채 사계절을 한 결같이 살아가는가.
태어나 경험한 모든 겨울의 밤은 밝았고, 실내는 따뜻했지만 생각해보면 내가 넘겨왔던 모든 겨울은 부자연스러운 겨울이었다. 없는 에너지를 어딘가서에 끌어다가, ‘에너지 저장고가 텅 빈’ 사실을 모르는 척 살아온 것이다.
겨울이면 활력이 떨어지는 나를,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왜 봄처럼, 여름처럼, 가을처럼 활력있게 살지 못하지? 하며 은근하게 나무라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쯤 글을 쓰다보니 알겠다. 겨울의 슬픔과 어떤 무기력은 지극히도 자연스러운 것이란 사실을 말이다. 그러니 겨울이면 슬퍼지는 나를 나는 더 이상 미워하지 않아야 겠다.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상태이고, 사실은 그 반대가 ‘이상’한 상태일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