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시 태어나도 우리'를 보고 나서
지난 주말 ‘다시 태어나도 우리'라는 제목의 다큐 영화를 봤다.
영화 속 주인공 '앙뚜'는 9살짜리 꼬마다. 마을 사람들은 아이를 '린포체'라고 부르는데, '린포체'란 아이가 전생에 티베트의 고승이었고 과거의 업을 이어가기 위해 환생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앙뚜는 아주 어릴 때부터 꿈속에서 자신의 티베트 사원을 보았고, 제자들이 생각난다고 말하기도 한다. 결국 여러 가지 테스트 끝에 린포체로 인정받은 앙뚜는 승려의 삶을 살아간다. 감독은 9년 동안 '앙뚜'의 삶을 조금씩 지켜보며 린포체로서 살아가는 그의 일상을 영화 속에 담았다.
린포체로 인정받으면 더 이상 태어난 가정에서 자랄 수없다. 그래서 앙뚜는 출가하여 그를 섬기고, 돌보는 스승 '우르간'과 함께 생활한다. 보통의 린포체들은 그의 전생에 소속되었던 사원으로 돌아가는데, 앙뚜는 중국이 티베트로 가는 길을 막고 있어 그의 사원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린포체로 인정받았던 처음과 달리 시간이 지나도 그를 데리러 오는 제자들이 없자, 점차 앙뚜는 마을의 사원에서 쫓겨나고(그곳엔 이미 다른 린포체가 있으며 한 사원엔 한 명의 린포체만이 존재해야 한단다) 갈 곳 없는 신세가 된다. 영화의 마지막은 오갈 데 없어진 이 아이가 스승 우르간과 함께 직접 자신의 사원을 찾아 인도에서 티베트로 가는 고된 여정을 보여준다.
처음 가족들과 영화를 볼 땐 '린포체'로서의 삶을 받아들인 아이와 그 아이를 돌보는 스승의 일상을 그저 먹먹한 마음으로 지켜봤다. 연고도 없었던 아이가 린포체라는 이유로, 자신의 직업을 내던지고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돌보는 우르간의 행동도 신기했고(그는 60대 후반의 노인이다), 가족과 생이별하고 불자로서 살아가는 아이도 신기했다. 나는 '티베트 고승의 환생'이지만 여전히 아이다운 면을 가진 앙뚜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우르간과 앙뚜가 함께하는 삶을 응원하며 영화를 지켜봤다.
그런데 오늘 문득 '앙뚜는 어떻게 자신의 삶을 받아들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아빠와 행복하게 살아가는 또래 아이들이 부럽지는 않았을까? 사랑하는 스승과 생이별을 해야 하는 슬픔을 감당해야 하며, '내 사원'을 찾아가겠다는 명목으로 그 길의 끝이 보장되지 않는 수 백 킬로미터의 여정을 떠나는 삶을 이 아이는 어떻게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 삶이 가치 있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 걸까?
그러다 이 생각이 지극히 '나의 기준'으로 그의 삶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생긴 의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면 과거의 업보를 이어야 한다는 이유로 현재의 소중한 것들을 잃어야 한다면, 그것은 괴롭고 가치 없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도에서 태어났고, 전생을 기억하는 '앙뚜'에게는 자신의 사원을 찾아가 훌륭한 고승이 되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일 수 있을 것이다.
세상 모든 이들에게는 저마다의 우주가 있고, 삶의 방식이 있는데 그 방식이 '타인에게 위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모든 이의 삶은 제 각각의 가치가 있다.
이렇게 보니 내 삶의 맥락 속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며 노력해 온 나의 삶도 충분히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비교의 마음'이 이 복잡한 생각을 하게 한 원인이었을테다. 앞으로 타인과의 비교로 내 삶이 가치로운가 아닌가를 따져보는 마음이 든다면 앙뚜의 삶을 떠올려봐야겠다. 그의 삶도, 나의 삶도 모두 가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앉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