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교훈

#7 Saint-Jean-Pied-de-Port

by 박고래

공립 알베르게 55번지에서의 밤. 공용 공간에 놓인 작은 테이블 한편에서 일기를 썼다. 낮은 조도의 조명으로 인해 주변은 어둑했고, 맞은편엔 같은 방을 쓰는 아저씨가 앉아 계셨다. 뒤늦게 숙소에 도착한 뒤, 짐을 풀고 공용 공간으로 나온 나에게 함께 앉아 일기를 쓸 수 있게 자리를 내어준 아저씨는 곧 나와 대화를 하고 싶은셨는지 스페인 어로 말을 걸어왔다.


그는 순례자 여권(또는 '크레덴시알'이라고 불린다.)을 굉장히 많이 가지고 있었다. 신난 표정으로 그가 수많은 여권들을 내게 보여줬는데 2013년부터 6년을 줄곧 걸으면서 받은 스탬프들이 여러 개의 순례자 여권에 찍혀 있었다. 그냥 봐도 10개는 넘는 양이었다. 어떤 사연이 있으면 그렇게 오랜 시간 길 위를 걸으며 살아가게 되는걸까? 궁금했지만 실례가 될 것 같아 따로 묻지는 않았다. 그저 그의 자랑스러운 눈빛에 호응하며 감탄스러운 표정으로 낡은 순례자 여권들을 살펴보았다.


한 시간이 넘게 우리는 마주 앉아 각자 글을 쓰고, 중간중간 대화를 나눴다. 그는 스페인어로, 나는 영어를 썼다. 서로에 대한 호감을 전하기에 충분한 정도의 바디 랭귀지 80%, 언어 20%로 이뤄진 대화였다.


그날 알베르게에 머무는 모두가 프랑스어나 스페인어를 사용했다. 좀 더 원활하게 대화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하며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여행을 왔어야할까’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러다 나의 충분하지 못한 영어 실력까지 생각이 다다랐다.


‘스페인어가 웬 말인가, 영어도 아직 부족한데…’


직장을 다니는 내내 늘 영어를 배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스터디나 영어학원을 오고 가며 ‘무늬만 공부한 것은 아닌지’, 그저 영어 공부를 한다는 행위 자체에 감동하며 살아온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되었다.


프랑스에 처음 도착해 미정 언니의 프랑스인 친구 루이를 만났을 때, 공항에서 파리 시내까지 오는 열차를 타고 줄곧 그와 대화를 나눴었다. 이야기의 소재는 넘쳐났지만, 적절한 영어 단어를 찾지 못한 나 때문에 자주 대화에 버퍼링이 걸리곤 했다. 지하철 역내 방송에 대해, “소리를 좀 더 키워서 방송을 하면 좋겠어.”라고 말하거나, “내가 파리에 도착했을 때 강도, 테러 등을 조심하라는 문자를 외교부에서 받았거든. 너희가 우리나라에 오면 어떤 문자를 받는지 궁금해.” 등의 질문을 매끄럽게 하지 못해 얼굴이 붉어지기도 했다.


미국인, 프랑스인 여행자들이 스페인어를 쓸 줄 아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나의 ‘영어공부’에 대해 반성하게 되었다. 내가 했던 영어공부는 ‘무엇을 위한’ 공부였을까. 비즈니스를 위한 단어를 외운 것도 아니고, 일상 회화를 익힌 것도 아니고, 너무 중구난방으로 공부하는 시늉만 한 건 아니었는지…


많은 외국인 친구를 사귀고, 다양한 주제에 대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외국어 실력을 갖고 싶다는 여행의 교훈은 언제나처럼 빠르게 내게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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