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Saint-Jean-Pied-de-Port
조심스레 순례자 오피스에 들어서자 나이 지긋하신 두 분의 할아버지가 웃는 얼굴로 나를 맞아 주셨다. “올라(Hola)”하고 인사한 뒤엔 나를 잠시 대기시키고, 먼저 온 프랑스인 여자분의 민원을 처리하셨다.
조금 기다리니 내 차례가 되었다. “꼬리아나?”라는 질문에 “예스”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한 할아버지가 휴대폰을 향해 큰 목소리로 빠르게 뭔가를 외치셨다. 그리곤 불쑥 내게 폰을 내미셨다.
순례자 여권을 만드는데 2유로를 내야 합니다.
번역기 앱(App)이 할아버지의 프랑스어를 듣고, 한글로 번역된 문장을 어설프게 소리내 읽어주었다. 생각보다 괜찮은 번역기의 번역 수준에 감탄했지만, 그런 방식의 대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기계를 향해 큰 소리로 또박또박 외치는 일에 금세 지치셨는지(거의 소리를 지르다시피 하셨다), 한 두 마디를 번역 앱으로 주고받은 후에는 폰을 내려놓으셨기 때문이었다. 이후엔 몇 장의 지도 및 까미노에 대한 설명서와 함께 손짓, 발짓을 하며 내가 알아야 할 것들을 설명해 주셨다.
‘3월엔 피레네를 넘는 길이 위험하니, 다른 길로 가야 한다.’는 내용은 종이 지도를 꺼내 피레네 길에 새빨간 X를 여러 개 치면서 거듭 강조하셨다. 그의 표정이 심각한 걸 보니, ‘절대로 가면 안되는구나’ 하고 절로 깨닫게 되었다. 이때 우리가 주고받은 공용어는 ‘NO’와 ‘YES’, 그리고 ‘OKAY'가 전부였지만, 나는 언어와 상관없이 할아버지의 말을 ‘들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주의사항을 확인한 뒤엔 순례자 여권을 발급받고 이후 가리비를 골랐다. 가리비는 순례자들이 가방에 달고 다니는 순례자를 상징하는 물건인데, 예수의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야고보의 시신이 가리비에 감싸여 손상되지 않은 채 보존되어 있었다는 전설과 관련된 것이라고 했다.
안내를 해주신 할아버지가 손짓으로 수북하게 쌓인 가리비와 모금함을 함께 가리키셨는데, 여행 계획을 세우면서 ‘순례자 등록 절차’를 확인해 두었던 터라 할아버지의 간단한 손짓 만으로도 무엇을 하라는 것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가리비를 함께 골라 주셨는데, 덕분에 은은한 분홍빛이 도는 예쁜 가리비를 찾아 가방에 매달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공립 알베르게에 자리가 있으니 그곳으로 가면 된다는 안내가 이어졌다. 이 대화 또한 수많은 알베르게 리스트가 적힌 종이 위의 ‘55번 알베르게’를 할아버지가 볼펜으로 표시해 주시고, 나는 “예스”라고 대답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말과 번역 앱, 그리고 제스쳐를 통해 할아버지들과 소통을 하며 아무리 ‘번역 앱’이 발달했다고 해도 아직은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람이 자유롭게 소통할 수준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과 발, 표정과 몸짓, 그림으로 필요한 정보를 나눠주고, 질문하고, 대답하면서 문득 진짜 소통이라는 것은 기계가 아니라 살아있는 것들 사이에서만 이뤄질 수 있는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순례자 사무실의 할아버지들과 ‘정보’뿐 아니라 ‘마음’도 함께 나눴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이란 무릇 번역기, 즉 기계가 전할 수 없는 비언어적 표현으로 더 많이 전달되는 법이니 말이다.
그날 나는 할아버지들이 내게 쏟는 ‘초보 순례자를 위한 걱정의 마음’, ‘알베르게를 안내해주는 친절한 마음’, ‘순례 여행을 위해 멀리 프랑스의 소도시까지 찾아온 여행자를 바라보는 흐뭇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할아버지들도 대화 내내 감사했던 내 마음을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프랑스어나 스페인어를 전혀 모르는 나는, 여행 전 소통에 대한 두려움을 가졌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들과의 대화를 통해 열린 마음과 바디랭귀지만 있다면 세계 어디에서든 얼마든지 소통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책, <배움의 시간을 걷는다>의 일부입니다. 출간 전 사전 펀딩 진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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