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Saint-Jean-Pied-de-Port ▶︎ Valcarlos
나폴레옹 길이 아닌 비교적 안전한 대체 루트로 돌아와 걷기 시작할 무렵 우리에게 ‘시험’이 찾아왔다. 모두 파김치가 되어 터덜터덜 걷고 있는데 한 승용차가 나타나 우리에게 목적지까지 태워주겠다고 제안한 것이었다. 이 얼마나 친절한 제안인지! 하지만 순례 여행의 첫날이 채 끝나지도 않은 시점이라 나는 차마 차에 올라탈 수 없었다. 알리샤와 알베르토 아저씨 또한 걷기를 선택했고, 다고 할아버지만 차를 타고 발칼로스로 이동하기로 했다.
승용차가 떠난 후 알베르토 아저씨는 정확한 루트를 찾아보겠다며 먼저 떠나셨다. 알리샤와 나는 아저씨가 간 방향을 추측하며 발칼로스로 가는 길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더 걸은 뒤에야 눈이 녹아 걸을 만한 길을 만났지만 이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광활한 풍경, 들판에서 풀을 뜯는 해피 카우의 모습도 다시 기력을 찾는데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길을 빗 속에서 계속 걷는 일은 생각보다 더 고됐다. 함께 걷던 알리샤도 꽤 많이 지쳐 보였다.
어둠이 내릴 즈음 알베르토 아저씨를 다시 만났다. 아저씨는 제대로 된 루트를 찾은 뒤 우리를 만나기 위해 갔던 길을 되돌아오고 계셨다. 그가 페이스 메이커를 자처하며 우리와 함께 걸어 주었고, 덕분에 지칠 대로 지친 알리샤와 나는 겨우 발칼로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편안한 얼굴로 맥주를 마시고 있던 다고 할아버지와 재회했다.
다고 할아버지는 파김치가 된 우리를 위해 흔쾌히 저녁을 사셨다. 나는 오렌지 주스와 스페인식 감자 오믈렛인 또르띠야(Tortilla de Patata)가 든 큰 보카디요(Bocadillo)를 골랐다. 따뜻한 난로 옆에 자리한 우리 넷은 첫날의 여정을 무사히 끝낸 서로를 위해 건배했다. 그리고 발칼로스의 텅 빈 알베르게의 침대 위에 지친 몸을 뉘었다.
잠자리에 누웠을 때 문득 마음속에 질문이 떠올랐다. 다고 할아버지의 짐을 들어주었던 알베르토 아저씨, 묵묵히 걸으며 주변 사람들을 챙기던 알리샤, 우리에게 멋진 저녁과 잠자리를 선물해준 다고 할아버지는 내게 참 좋은 기억으로 남았는데, 그렇다면 과연 나는 어떤 사람으로 그들의 기억에 남을까?하고 말이다.
그리고 까미노에서의 첫 날을 혼자가 아닌 함께 시작할 수 있었음에 감사했다. 혼자서도 걸을 수는 있었겠지만 ‘함께’하면 분명 힘이 된다는 것을 절절히 느낄 수 있는 하루였으니 말이다. 혼자 걷는 것 보다 속도가 조금 느려질 수 있지만, 지칠 때 서로를 의지하며 동료들과 함께 걷는 일은 생각보다 더 즐겁고, 보람된 일이었다.
책, <배움의 시간을 걷는다>의 일부입니다. 출간 전 사전 펀딩 진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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