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된 피레네를 걸었던 첫 날의 기억

#8 Saint-Jean-Pied-de-Port ▶︎ Valcarlos

by 박고래

순례길을 걸은 첫날 밤. 나는 완전히 소진되어 불평의 말조차 늘어놓을 수 없을 만큼 지치고 피곤했다. 눈보라를 헤치고 비를 맞으며 9시간 30분동안 걸은 결과였다.


그날 아침 새벽같이 일어나 가방을 싸던 내게, 전날 밤 알베르게에서 만나 대화를 나눴던 스페인 아저씨 알베르토는 지금 혼자 나가면 안 된다며 나를 잡으셨다. 눈이 오고 캄캄하니 8시가 넘으면 함께 나가자고 하셨다. 덕분에 같은 알베르게에서 머문 알베르토 아저씨, 멕시코에서 온 다고 할아버지, 미국에서 온 알리샤, 그리고 나까지 넷이 함께 첫째 날의 여정을 함께하게 되었다. 밤 새 눈이 펑펑 쏟아져 세상은 온통 새하얗게 바뀌어 있었다.


“Snow and even rain can’t stop going to Camino.”

“눈과 비도 순례를 막을 수는 없지!”


출발하는 길에 잠시 들른 순례자 사무실의 할아버지들은 그렇게 말하며 우리를 격려했다. 그분들은 매년 까미노를 걸으신다고 했다. 베테랑들의 말을 들으니 날씨 때문에 내심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길을 떠나기 전 순례자 사무실에서 진한 믹스 커피 한잔을 얻어 마시며, 위험한 경로에 대한 정보를 한번 더 체크했다. 그리곤 펑펑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골목길 한가운데서 다같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눈이 소복이 쌓인 거리에는 동네 아이들이 눈싸움을 하려고 나와있었다. 아이들은 마을을 떠나는 우리를 향해 안전한 여행을 기원하는 인사말인 ‘부엔 까미노(Buen Camino)’를 외쳐주었다.


해맑게 인사하는 아이들을 보자 이들에게 ‘순례 여행’은 어떤 의미일까? 궁금해졌다. 얼굴과 눈동자의 색도, 체구도, 쓰는 언어도 다른 외국인들이 자꾸 커다란 배낭을 메고 모여드는 동네에서 살아가는 기분은 어떨까? 이방인이 모여들고 다시 떠나가는 모습을 자꾸 본다면 나도 금방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것 같았다. 궁금한 마음에 묻고 싶었지만 아직 마을을 떠나기엔 너무 어린 아이들에게 미안한 물음이 될 것 같아 차마 물어보지는 못했다. 언젠가 다시 생 장 피드포르를 찾는다면 어른이 된 아이들에게 꼭 한 번 물어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일행들과 함께 마을을 빠져나왔다.

**

설레는 마음으로 첫 걸음을 떼었던 날, 우리 일행은 순례자 사무실에서 절대 가지 말라고 했던 피레네(Pirineos) 길을 오르고 말았다.


그날 아침 10년 이상의 도보여행 경험을 가진 알베르토 아저씨가 앞장서 길을 안내했다. 아저씨는 노란 화살표나 흰색과 붉은색으로 자연물 위에 그어진 까미노의 표지를 읽을 줄 아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우리는 의심없이 그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점차 고도가 높아지면서 일이 꼬여갔다.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쌓인 눈이 표지를 가린 탓에 표지를 발견하기가 어려웠다. 눈발이 강해지고 고도가 높아지면서 종종 알리샤와 내가 우리가 가는 방향에 대해 의문을 표했지만, 알베르토 아저씨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고, 자신감이 넘쳤기 때문에 확신을 보이며 계속 앞으로 나아가셨다. 방향을 바꾸지 못하고 나아가던 우리는 산의 중턱 쯤에서 결국 지도 앱을 켰지만 이미 우리가 가야 하는 루트와 한참 반대의 길로 가고 있다는 슬픈 사실만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즈음에서 실수를 인정하고 돌아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그 당시엔 가던 방향을 고집해 조금만 더 가면 우리의 목적지인 발칼로스(Valcarlos)에 갈 수 있을 것만 같아 보였다. 산길이라 지도에 정확한 루트(route)가 표시되지 않았고, 이미 꽤 많은 거리를 걸어 온 탓에 경로를 바꾸기 싫었던 우리 넷은 조금만 더! 를 외치며 앞을 향해 나아갔다. 강력한 바람, 거세게 날리는 눈보라 속에서 정신없이 앞만 보고 걷던 우리는 겨우 산의 정상부로 보이는 위치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고지에서 씨름 선수도 날려버릴 수 있을 듯한 세찬 바람을 만났다. 가방에 씌워 놓았던 방수 커버가 벗겨져 낙하산처럼 부풀었고, 그것이 바람 속에서 미친 듯이 춤을 췄다. 그 덕에 나는 몸을 가눌 수 없어 두 손 두 발로 바닥을 기다시피 움직이며 바람을 피할 곳을 찾았다. 미련하게 앞으로만 나아가던 우리 모두는 자기 몸조차 지탱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서야 그 길을 돌아 나오기로 결정했다.


더이상 걷기 힘들어하시는 다고 할아버지의 짐을 받아 알베르토 아저씨가 메고(그는 10Kg 무게의 가방을 앞, 뒤로 2개 메고 산을 내려왔다.), 넷이 함께 손을 잡고 길을 돌아 내려왔다. 한참을 그렇게 앞만 보고 내려 와서야 우리는 마주 잡았던 손을 풀었고,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 지도 앱에 의지해 정상적 루트로 돌아갈 수 있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리가 ‘표지’를 잘 못 읽어 피레네를 넘어가는 나폴레옹 루트에 진입한 것이었다. 순례자 사무실의 할아버지가 빨간 X를 여러 번 그으며 경고하신 바로 그 길이었다. 생각보다 더 혹독한 신고식을 치르며 우리는 순례 여행의 본격적인 궤도에 들어서고 있었다.


책, <배움의 시간을 걷는다>의 일부입니다. 출간 전 사전 펀딩 진행 중!

전체 여행기가 궁금하다면 아래 링크 click 해주세요 :)

https://link.tumblbug.com/3FPqF9LJYxb


이전 08화순례자 사무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