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할 줄 알면서도 하게 되는 말

말은 먼저 나가고, 마음은 뒤늦게 따라온다.

by 희너지

“너 정말 이것도 몰라? 너 바보야?”


가시 돋친 말이 쏟아지자마자 아이의 눈시울은 붉어졌다. 순식간에 차오르던 눈물은 하염없이 흘렀다. 아, 이 말만큼은 하지 말 걸.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었다. 아이는 문제집을 꼭 쥔 채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한번 터진 말은 주체하지 못했고 방으로 따라 들어가 득달같이 쏟아냈다.




영하 10도를 웃도는 한파 날씨에도 둘째는 매일 수영장에 간다. 수영을 시작한 지 반년만에 아이의 꿈이 수영선수로 바뀔 만큼 열심히다. 수영장 입구에만 들어서도 물 만난 물고기처럼 변신한다. 차량 지원이 없어 매번 직접 라이딩해야 하지만 아이의 꿈을 응원해주고 싶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강습을 갈 시간을 기다리던 오후였다.


집에서 제법 거리가 있어 일찍 나서야 했다. 그런데 아이는 느긋하기만 했다. 책상에 앉아 무얼 하는지, 내 부름에도 대답이 없었다. ‘이제 옷 입고 갈 준비를 해야 하는데…’ 나는 목소리가 점점 급해졌다.


“OO아, 이제 수영 갈 시간 다돼 가. 옷 갈아입고 준비해.”


아이가 슬쩍 일어나길래, 이제 움직이려나 싶었다. 그런데 아이는 대뜸 문제집을 들고 내게 다가왔다.


“엄마, 이 문제 아무리 풀어도 모르겠어. 엄마가 좀 가르쳐줘.”


혼자서 잘 노는 아이라 그저 놀고 있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이제 보니 아이는 혼자서 한 시간 넘게 수학 문제집과 씨름하고 있었다. 풀다 풀다 끝내 안 풀리니 내게 들고 온 것이다. 문제집을 들여다보니, 어려운 문제를 스스로 어떻게든 풀어보려 애쓴 흔적이 빼곡했다. 기특하다는 마음이 먼저 올라왔지만 그 순간 손목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출발까지 10분 남았다.


“OO아, 이제 출발해야 해. 갔다 와서 하자.”

“나 이거 풀고 수영 가고 싶어. 엄마가 좀 도와주면 안 돼?”


재촉하는 아이의 목소리에 결국 나는 허겁지겁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문제는 대충 설명해서 이해될 만큼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문제보다 시계만 보였고, 마음은 점점 조급해졌다. 그러다 결국, 아이에게 못 박듯 말해버렸다.


“너 정말 이것도 몰라? 너 바보야? 엄마가 설명해 줬잖아.”


말이 칼보다 위험해지는 순간이 있다면 아마 지금 같은 때일 것이다. 그 한마디로 아이의 수학적 호기심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한 번에 꺾였다. 아이의 눈물이 번지기 시작했다. 흐르는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 바닥만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내가 뱉은 말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깨달았다.


우리는 늦지 않게 수영장으로 향했다. 차 안에는 차가운 공기가 가득했고 라디오 소리만 흘렀다. 룸미러로 아이의 눈치를 살폈지만, 아이는 창밖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날 저녁, 저녁 준비를 하겠다고 부엌에 들어섰다. 하지만 냉장고 문만 열었다 닫았다 할 뿐,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아이 방문 앞에 섰지만, 문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저녁 먹고 이야기하자 싶어 그대로 돌아서려던 순간, 내 마음이 나를 붙잡았다.


‘더 후회하기 전에, 미안하다고 말해.’


무거운 손을 용기 내 들어 올렸다. 똑똑똑. 방 안은 컴컴했다.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아이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머리카락 한 올도 내놓지 않고 있었다. 아까 바닥만 보며 울던 모습처럼,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이불속으로 숨어든 것 같았다. 나는 이불속으로 손을 넣어 아이의 발을 찾아 천천히 쓰다듬었다. 나의 화해 신호에 답을 주는 듯 아이는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까는 엄마가 정말 미안해. OO이가 정말 열심히 풀었는데, 모를 수도 있는데... 엄마는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바빴어.”


적막함이 감돌던 방 안에, 내 말이 조심스럽게 퍼져 나갔다. 그 순간 아이가 이불속에서 얼굴을 드러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는 되려 자기가 미안하다고 했다.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온전히 내 잘못이라며 용서를 구했다. 우리는 심장을 맞대고 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후회할 걸 알면서도, 꼭 해버리고 마는 말이 있다. 그 순간만큼은 “이성의 끈을 놓았다”라고 변명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알고 있다. 감정이 폭풍처럼 몰아칠 때, 내 안의 다른 내가 슬그머니 튀어나오고 있다는 걸.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내뱉는 순간,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는 것도 말이다.


이제는 때와 장소를 가리며 말하는 어른인 척하면서도, 정작 남보다 가까운 이들에게 더 쉽게 쏟아낸다. 가까울수록 미숙함이 자주 출몰한다. 올해는 더욱 내 사람들에게 잘해야지, 후회하지 말아야지 다짐하지만 이 또한 새해 다짐처럼 금세 흐려진다. 그래도 올해도 조용히 약속해 본다. 내 사람들에게 다정한 사람이 되기로.

월요일 연재
이전 06화남의 눈치 말고, 내 눈치부터 살피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