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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필작가 Jun 29. 2021

앞으로 앞으로

Bravo, my life!(12)

대필작가의 말

- 가족 여행을 가서 관광안내도를 볼 때면 할아버지는 항상 한국전쟁 당시 지나쳤던 경로를 알려 주시곤 했습니다. 매번 저는 그 많은 곳들을 걸어서 이동했다는 데 놀라곤 했는데요. 이번에 글을 정리하면서 보니 그보다 더 놀라운 이야기들이 많았습니다. 어찌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말씀하시는지 남루한 옷차림에 궤가 제각각인 태극기를 든 사람들이 제 눈앞에도 보이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올해가 벌써 한국전쟁 71주년입니다. 전쟁의 상흔이나 동족상잔의 비극은 이제 교과서나 기념사에서 볼 수 있는 표현이 된 것 같아요. 하지만 아직 우리의 아픈 역사를 안고 사시는 분들이 있음을, 더 늦기 전에 알고 귀 기울이는 일도 중요한 것 같다고 감히 말해봅니다.




 M47 탱크가 처음으로 나타났다. 8월 28일경으로 기억하는데, 비가 억수로 오는 날이었다. 판초 우의 하나만 입고 산에서 보초를 서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탱크가 나타났다는 말에 화들짝 놀라 일어났던 기억이 난다. 그날은 큰 길가 어떤 마을에서 잤다. 다음날, 인민군에게 포위가 돼서 차고 장비고 모두 버리고 넘어왔다는 사람들을 만났다. 얼굴이 긁힌 사람도 있고 옷이 걸려 찢어진 사람도 있었다.

      

  옆에는 고장  인민군 탱크가 많았다. 들리는 말로는 우리 쪽으로 내려왔던 것은 모두 파괴됐다고 했다. 이날 우리 부대는 인민군들이 10  내려오는 것을 발견하여 붙잡았다. 덤불 속에 숨어있던  명도 생포했다. 나중에 들으니  녀석은 정보과에서 신문해도 입을 다물고 대답을  해서 손을 뒤로 묶은  풀어주고는 200m 갔을  사살했다고 했다.     


 우리는 계속 동해안으로 전진했다. 한 번은 삼척 고개를 넘어가다가 돌연 차가 섰다. 내려가 보니 앞바퀴 하나가 공중에 있고 세 바퀴로 세워져 있었다. 좁은 길에서 차를 돌리다가 하마터면 큰 개울로 떨어질 뻔한 것이었다. 그 고개가 삼척 못 미쳐 있는 곳인데 비행기재라고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통천이란 곳을 지나면서 석왕사란 절도 봤다. 낭떠러지에 지었는데 바로 앞이 바다였고 경치가 좋았다.      


 원산 전투(*1950. 10.)에서는 우리 백골부대가 원산을 점령했다. 나는 2등 상사로 특진했다. 신고산을 지날 때 동네 사람들이 깃발을 들고 나와 반기는데 태극기가 제각각이고 궤를 제대로 그린 것이 없었다. 그래도 국군 동무 수고한다고 인사해 주어 고마웠다. 북청, 영흥을 지나 함흥에서는 인민군들이 도망가면서 사람을 죽여 우물에 꽉 채워 넣은 것도 보았다. 단천을 지나 성진에서 며칠 머물렀고 길주, 명천에도 있었다. 성진에서는 대대 연락 하사관을 했다. 대대 부관의 명으로 단천을 갔다가 차가 없어 오도 가도 못하던 걸 동네 대한청년단 사람을 만나 하룻밤을 신세 지기도 했다.     


 1950년 12월, 사단 사령부로 전속이 되었다. 당시 나는 수용 중대 서무계를 하다가 대대 행정과 선임 하사관이 되었고, 우리 부대는 회문에 주둔하고 있었다. 어느 날 외출을 나갔을 때의 일이다. 길에서 노인 한 분을 만나 난리통에 손해 본 것 없으신지 물었더니 전 재산이나 마찬가지인 소 한 마리가 있었는데 군인이 와서 끌어갔다며 내년 농사는 못 지을 것 같다고 하셨다. 한탄할 힘조차 없으신 듯 쓸쓸히 웃어 보이시는 모습에서 문득 고향에 계실 아버지 모습이 보였다. 소 가격이 얼마나 하냐고 했더니 백만 원 정도라고 하셨다. 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시계를 새로 사려고 봉급 모아뒀던 것이 딱 백만 원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이 노인을 도우라는 하늘의 계시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망설임 없이 지갑 속에서 돈을 꺼내어 건넸다.


 “백만 원이면 바로 사실 수 있는 거죠? 이걸로 사세요.”


 노인은 돈을 손에 든 채 잠시 말이 없었다. 무슨 상황인지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그러다 이렇게 큰돈을 왜 자기한테 주냐고 더듬거리며 물었다.

 

 “다른 걸 사려고 모아뒀던 건데 소가 더 급해 보여서 드리는 겁니다. 잘 골라서 꼭 좋은 놈으로 사세요.”

 

 노인은 처음엔 당황한 표정이 역력하더니 이내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며 연신 허리를 숙였다. 큰돈을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준 셈이지만, 이 어려운 시기에 아버지 같은 분을 도울 수 있었다 생각하니 감사한 마음까지 들었다(서너 달 있다가 시계도 잘 샀다). 이후에도 문득 그 노인이 소를 사서 농사를 잘 짓고 계시겠지 하고 마음이 기쁘다가도 아버지는 고향에 잘 계실까 하며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일이 반복되곤 했다.


 회문에서 1주일가량 주둔한 뒤 북경성, 성진을 거쳐 부산으로 갔다. 부산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는데 땅에 떨어지면 바로 녹았다. 과연 남쪽이구나 싶었다. 하룻밤을 잔 뒤 배를 타고 삼척으로 가서 강릉까지 행군했다. 아침 식사 이후 아무것도 안 먹고 묵호 뒷산에 올라갔는데 어찌나 배가 고픈지 발을 떼어도 몸이 앞으로 가질 않았다. 산 아래를 보았더니 불이 켜진 집이 있길래 찾아가서 혹시 밥 남은 것 있으면 조금만 달라고 했다. 주인은 오늘 집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밥이 없으니 조금 기다리라더니 밥보다 나을 것이라며 꿀 짠 찌꺼기를 주었다. 깨물어 한 입 먹었더니 달고 맛있는 게 정말 꿀맛이었다. 1/3쯤 먹고 가지고 올라와서 동료들에게 주었더니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모두가 배고팠기에 함께 나누어 먹으며 강릉까지 왔다.   

  

 강릉에서 양양을 거쳐 주문진에서 머물던 어느 날 꿈을 꾸었다. 큰 두 마리의 용이 집에 들어앉아 앞으로 나와 함께 살겠다고 하기에 쩔쩔매다가 깼다. 아침에 동료들에게 꿈 이야기를 했더니 아주 좋은 꿈이라면서 오늘 강릉 외출 나가면 좋은 일 생길지 모르겠다고들 했다. 정순길 중위님에게 외출을 신청했지만 오늘은 인사계도 없는데 당신까지 나가면 안 될 것 같다고 거절당했다. 사실 특별히 볼일이 없었기에 알겠다고 하고 하루 종일 천막에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니 외출 갔던 군인들이 돌아왔다. 내가 ‘꿈이 좋다구들 하더니 외출도 못 나갔다’고 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사령부에 나가 있던 곽하사였다. 그는 ‘선임 하사님 후방으로 가시게 됐어요’ 하더니 잠깐 사이에 숨을 헐떡거리며 들어와서 육본 의무감실 의무감이 대대장에 보낸 전언 통신문을 전했다. 우리 대대에서 일등상사 2명과 2등 상사 5명을 창설부대 요원 하사관으로 정했으니 출발시키고 결과보고하라는 내용이었다. 정말 꿈같은 일이 생긴 것이다.      


 다음날 결재를 올리고 대대장한테 신고 준비를 하는데 대대장이 특명이 내려오기 전엔 보낼 수 없다고 했다. 닭 쫓아가던 개 형국이 된 것 같았지만 부대장 격인 대대장 말이니 별수 없었다. 절망 상태로 있는데 3시경 부관이 오더니 빨리 출발시키라는 대대장 명령이 떨어졌다면서 신고도 생략하고 출발하라고 했다. 아침에 준비해 두었던 출장증을 갖고 바로 떠났다.


 대구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장비들을 차곡차곡 준비했다. 완전히 다 끝내는데 14일이 걸렸다. 15일째 되는 날 인원을 완전히 채워서 모든 장비와 인원과 보급품을 싣고 청주 담배공장 앞에 있는 창고로 가져다 쌓았다. 장교 하사관들도 보직이 되었다. 중대장 중령 김용태 씨가 됐고 보좌관은 안진현 대위, 제1의무야전창고 창고장은 박경수 중위, 제2의무대전 창고장은 서재호 대위, 제3의무야전 창고장에는 정근수 중위가 임명됐다.


 하루는 인사계 하 상사가 서울, 원주, 양주에 창고가 생기는데 어디로 가고 싶냐기에 집 가까운 서울로 가고 싶다고 했는데 정말 서울에 있는 제1의무야전창고로 배치됐다. 창고장인 박경수 중위님은 부산 출신으로 잔소리가 없고 후한 분이었다. 나는 창고장을 보좌하여 창고 내 하사관과 사병들을 통솔하고 보금품 신청이 들어오면 할당 규정에 입각해서 불출계에 주는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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