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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필작가 Jun 20. 2021

무뎌지지 않는 이별

Bravo, my life!(11)

대필작가의 말

- 이번 이야기에는 유난히 구체적인 지명도 많이 나오고 화폐 개혁이나 안강-기계 전투 등 역사적인 사실도 많이 등장합니다. 중간중간 웹사이트를 찾아보며 시기가 맞는지 비교해 봤는데 거의 다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또렷하게 기억하고 계시다는 것이 존경스러우면서도 얼마나 강렬한 기억이면 그러실까 안타깝기도 합니다. 모든 기록들을 잘 정리해서 남기는 게 손녀로서 해드릴 수 있는 최소한의 효도이자 평화를 빚진 세대로서의 의무인 것 같네요. 좀 더 부지런해져야겠습니다.




배가 너무 고프니 발을 내딛어도 몸이 앞으로 나아가질 않고, 발만 허공에서 빙빙 돌았다. 할 수 없이 길 옆의 동네에서 밥 동냥을 하기로 했다. 첫 집에 들어갔더니 아무도 없었다. 먹던 밥이라도 있으면 먹으려고 둘러보다 솥뚜껑을 열었더니 한 숟가락도 푼 흔적이 없는 새 밥이 있었다. 그릇을 하나 찾아 밥을 담고 뜰 안에 있는 단지에서 고추장을 퍼서 버무렸다. 정말이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다 먹고 물까지 쭉 들이켜니 그제야 살 것 같았다. 집주인은 끝까지 만날 수 없었다. 부랴부랴 피난이라도 간 건지 모를 일이었다. 마음속으로 감사 인사를 했다.    


  집에서 나와 한참 내려가니  동네가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수원이라고 했다. 마침 무개화차에 군인들이 타고 지나갔다. 우리 부대 사람들은 아니고 11 12연대 사람들이었는데 부상자가 많았다.  차를 타고 한참 가다가 우리 부대 마크를  사람들이 보여 내려갔더니 의무대 사람들이었다. 반가웠다. 점심 먹었느냐고 묻기에  먹었다고 했더니 저기 가면 중국집이 있으니까 먹고 오라고 했다. 거기서 손현식 하사와 함께 짜장면을  그릇씩  먹고 부지런히 가보니 이미 부대는 떠나고 아무도 없었다.      


 열차는 늦게야 왔다. 신탄진까지 가는데 거기 있던 군인들도 우리들처럼 부대를 잃어버린 사람들이었다. 대전까지 가면 대전에서 부대를 찾아주는 게 아니라 새로 부대를 창설해서 전선으로 보낸다고 했다. 신탄진에서 내려 우리 부대가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데 백골부대 마크를 단 군인들이 지나갔다. 어디로 가느냐고 했더니 청주라고 했다. 좀 있다가 청주로 가는 열차가 왔기에 무조건 탔다.

      

 손현식 하사와 청주에서 내렸을 때는 이미 캄캄했다. 어디가 어딘지를 모르니 두리번거리면서 걸어가고 있는데 헌병 둘이 우리 쪽으로 오고 있었다. 갑자기 헌병  사람이   모르냐고 하는데 알고 보니 우리 의무대에 가끔 놀러 오던 이덕우 상사였다. 반가웠다. 숙소로 가자기에 따라갔더니 민가였다. 아주머니에게 “ 사람 저녁을 먹여 여기서 재우고 내일 아침도 먹이세요.” 하고는 “여기서 자고 있으면 내일 아침에 너희 심사관  중위를 데리고 올게. 나는  근무라서 간다.  자라.”  했다. 저녁상이 들어왔는데  귀한 조기에 고깃국, 쌀밥에 김치가 놓여 있었다. 맛있게  먹고 군대 들어온  처음으로 편안한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세수를 하고 나니 어제처럼 잘 차린 상이 또 들어왔다. 잘 먹고 앉아 있으니 이 상사와 김 중위가 왔다. 김 중위가 고생 많이들 했다며 데리고 큰 식당으로 가서 육개장을 사주었다. 난생처음 먹어보는 육개장이었다. 김 중위는 우리에게 수박을 한 통씩 사 주더니 기다리면 곧 부식을 싣고 오겠다고 했다. 골목에 서서 수박을 먹고 있는데 부식 실은 트럭이 와서 그걸 타고 진천에 있는 부대로 갔다. 경례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더니 모두들 반가워했다. 일보계가 “너희들 행방불명이라고 보고했는데, 내일 고치면 돼.”라고 했다.     


 그다음 날에는 아침 식사 후에 위생병이 없는 8중대로 가게 됐다. 좀 있으니까 8중대 군인이 데리러 왔다. 같이 가는 중 산 밑에 이르렀는데 휙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뒤를 보았더니 수 미터 떨어진 밭고랑에 포탄이 꽂혀 있었다. 땅이 굳어서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거꾸로 꽂혀 있었는데 그게 터졌더라면 죽었을 것이다. 저번에 이어 두 번이나 불발탄 덕에 목숨을 건진 것이다. 문득 예전에 휴가 갔을 때 어머니가 치성드리는 것을 본 것이 생각났다. 다시금 어머님에 대한 고마움과 그리움이 솟아올랐다.


 그날 저녁 후퇴를 시작했다. 오근장이란 곳에서 잠시 쉬는데 농협 창고에서 “김일성 장군 만세, 인민공화국 만세!”라고 외치는 소리가 길까지 들려왔다. 밤에 차와 군인들이 몰려오니 인민군들이 오는 줄 착각했던 것이었다. 한 시간 가량 휴식 후 다시 출발해서 청주 못 미처 편원에서 잠시 머물렀고 청주 지나 은익면이란 곳에서 인민군과 격돌했다. 미군 비행기가 기관총으로 우리 차에 싣고 있는 대전차 지뢰를 쏘아 연발로 터지는 바람에 모두 도망쳤다. 나는 옆에 있는 담배 밭으로 들어갔다가 숨을 곳이 마땅치 않아 동네로 들어가 숨었다.


 조금 있다가 길로 나와보니 기관포 탄피가  꽂혀 있고 군인들이 산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일단 따라가긴 하는데 첩첩산골이라 뭐가 있을  같지 않았다. 얼마를 내려가니 불이 반짝이는 곳에 피난민과 군인들이 가득했다. 인민군 따라 서울서 왔다 잡힌 여대생도 여럿 있었다. 보초를  시간씩 섰는데  번이나 졸았다.

     

 선잠을 자고 이른 아침, 집결지인 보은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절에서 보리밥에 된장으로 요기를 했다. 보은에 도착해서 새로 사단장이 된 김석원 준장의 훈시를 들었다. 김 준장의 첫마디는 “내가 바로 김석원이다”였다. 군대에서 그런 훈시를 하는 사람은 처음이라 군인들도 웃었고 나도 웃었다. 훈시의 요지는 국민들이 군인을 믿고 있으므로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죽을 사람은 총에 안 맞아도 죽는다, 총알이 사람을 피해야지 사람이 총알을 피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도 했다. 연설이 끝난 뒤 차를 타고 영천, 문경, 예천을 지나 상주로 향했다. 창밖으로 몹시 내리는 비를 보고 있는데 문득 이젠 다신 고향에 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력한 나 자신과 부모님 생각에 왈칵 눈물이 났다. 소리를 죽여가며 울고 또 울었다.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갑자기 비행기가 날아와 차에서 논으로 뛰어내리기도 했다. 물이 깊어 다들 흠뻑 젖었다. 미국인 고문관도 같이 뛰어내렸는데 나중에 몰골을 보니 우리보다도 처량했다. 상주서 의성, 안동을 거쳐 쭉 후퇴했다. 예천에 있을 때 화폐 개혁이 단행됐다. 화폐가치가 300대 1이 되어 우리 돈은 이제 못 쓴다고 했다. 가마니에 넣고 불을 놓았다가 다시 쓴다는 말이 나와 급히 꺼내기도 했다. 안동을 거쳐 내려가다 안강과 기계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안강 전투 후 1등 중사로 진급을 한 손현식 중사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와 고향이 같기도 했고 일전에 함께 3일간 애쓰면서 부대를 찾았던 생각이 나서 측은했다. 


 우리 부대가 북경성이란 곳에 갔을 때 중공군이 밀고 내려왔다. 그 바람에 단천 못 미쳐 성진에 있다가 LST(*Landing Ship Tank, 미 상륙 작전용 함정)를 타고 밤새워 바다를 내려가 부산에 도착했다. 그 와중에도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땅에 닿는 족족 녹아 버리는 풍경에 신기해하던 기억이 난다. 배에서 내리지 않고 다음날 아침 바로 삼척으로 향했다. 거기서 일주일 가량 있다가 어느 날 새벽같이 단독 무장을 하고 강릉까지 행군을 시작했다. 당시 식량이 부족해서 배추 밑동과 미숫가루 같은 가루, 사탕 두 알만 먹고 버텨야 했다. 배가 고프고 다리가 힘이 빠져서 죽을 지경이었다.


 묵호 뒷산에서 휴식을 한 후 계속 걸어 강릉역사에 도착했다. 강릉에서는 일주일 가량 있다가 주문진으로 이동했다. 너무 배가 고프니 앞바다에서 미역이라도 건져 먹자고 서너 명이 나섰다. 솔밭을 헤치고 중간쯤 가는데 갑자기 바닥이 물컹하더니 농구화를 신은 인민군 발목이 쑥 올라왔다. 근처를 둘러보니 여러 명을 한 구덩이에 묻은 듯한 흔적이 있었다. 아무리 적군이라지만 같이 전쟁하다 죽은 전우를 되는대로 묻고 떠나야 했을 이들을 생각하면 참 안된 생각이 들었다. 전쟁이 끝난 뒤 미 8군에서 근무할 때 그쪽을 방문할 일이 종종 있었는데, 솔이 무성하게 자란 곳을 지날 때면 등골이 서늘해지곤 했다.   


 기계 전투(*1950년 8월) 때는 길마다 시체가 밟혔고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식사를 할 때면 그 냄새 때문에 애를 먹었다. 여름철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치열하고 참혹한 전투였다. 청송을 지날 때는 우리 앞뒤로 인민군이 가고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상하게 무섭지 않았다. 당시엔 전쟁이 한창이던 때라 무뎌졌던 것 같다. 총포 소리와 죽음이 일상화된다는 것은 지금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반복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행군을 하면서 밑을 내려다보니 큰 복숭아밭이 있었다. 주인이 피난을 갔는지 누렇고 먹음직스러운 복숭아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는데 행군 중이라 아무도 내려가서 따먹을 수 없었다. 그 복숭아밭이 오래도록 눈에 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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