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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필작가 May 26. 2021

전쟁의 포화 속으로

Bravo, my life!(10)

대필작가의 말

- 최대한 연대기 순으로 정리해 보려고 하는 중입니다만, 할아버지께서 강렬했던 기억 위주로 글을 쓰셔서 그런지 비슷한 내용별로 묶다 보면 시기가 조금 뒤섞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난생처음 서울로 외출을 나갔다. 여기저기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휴가자 외출자는 빨리 귀대하라는 스피커 소리가 들렸다. 부랴부랴 부대로 들어와 완전무장을 하고 연병장에 나가 섰더니 버스가 와서 태우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한 시간쯤 가더니 어떤 산 밑에서 모두 내리라고 했는데 거기가 파주의 감악산이었다. 옆의 논에 있는 모가 아직 노랗게 보이고 물이 맑은 것으로 보아 심은지 일주일 정도 된 것 같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평화로운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실제가 아닌 듯 아득하게 느껴졌다. 지시에 맞춰 약 300m가량 산을 올라갔더니 “배낭을 내려 한 곳에 정렬시키라”고 했다. 우리는 배낭을 모두 내려놓고 연대 본부 사람들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도 배낭 안에 부모님 사진을 그냥 두고 온 것이 후회막급이다. 그날 이후로 영영 부모님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올라가니 가는 곳마다 발아래 덩굴에 불빛이 비치고 연기가 펄펄 나고 있었다. 하지만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누군가가 “저기 봐”라고 소리쳤다. 인민군들이 동두천 쪽에서 의정부 쪽으로 오토바이를 잔뜩 실은 소달구지나 세발 오토바이에 타고 가는 것이 보였다(동두천과 의정부는 나중에 가서야 안 지명들로, 당시에는 몰랐다).  시계가 없어 시간 가는 것도 모르고 얼마를 더 올라갔다. 처음 보는 연대본부의 높은 분들이 플래시로 비추면서 지형을 점검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무조건 후퇴해야 한다고 소리치기도 했다. 

 

 아무튼 우리는 계속 걸었다. 앞사람 가는 대로 비를 맞으면서 걷고 또 걸었다. 지금 생각하니 구파발 근방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쫄딱 젖은 군복을 입고 점심도 저녁도 굶으며 맥없이 걸어 서대문에 있는 아리랑 고개에 집합했다. 모두 개인 참호를 파고 들어가 있으라더니 주먹밥에 소금을 발라 주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정말 맛있게 먹었다. 밥을 다 먹고 나니 누군가 와서 빈 병 한 개와 성냥 한 갑씩을 나눠주었다. 이따 휘발유를 갖다 줄 테니 전차가 오거든 올라타서 윗문을 열고 불을 붙여 넣으라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죽으라는 말이었다. 운이 좋아 전차에 올라갔다 하더라도 포탑이 빙빙 도니 금세 나가떨어졌을 것이고, 그걸 적이 본다면 살려둘 리 만무했다. 천만다행으로 전차는 오지 않았고 시내에서 다니는 소리만 들렸다. 

     

 점심으로 또 주먹밥을 먹고 참호에 들어가 있으니 저녁때가 다 됐다. 서대문 형무소 문을 열어서 죄수들이 다 나왔다는데 내가 잘 아는 김귀돌 하사가 군복에 완전무장을 하고 가는 것이 보였다. 반가워서 “귀돌아” 불렀더니 뒤를 돌아다 보고는 들은 건지 만 건지 휙 가버렸다. 그는 우리 중대원이었는데 일요일에 해방촌이라고 부대 건너편에 있는 마을에 외출 나갔다가 나쁜 짓을 해서 헌병대에 잡혔었다. 영창에 간 이후로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고 있었는데 우연히 본 것이다. 나보다 7개월가량 선임자였고 고향은 대구였다. 고참 티를 많이 내는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그는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부디 그가 고향에서 잘 살기를 바랐다.     

 

 저녁때가 되자 후퇴 전갈이 왔다. 얼마를 걸어갔더니 크고 넓적한 배가 있고 장교 하나가 정복 차림으로 지프차 위에 앉아 있었다. 무조건 올라탔다. 그렇게 한강을 건너 행주에서 김포로 갔다. 개인 참호를 파려고 해도 칡뿌리가 얽혀있어 도저히 팔 수가 없었다. 얼마 동안 어두운데 서 있노라니 길로 나오라는 전갈이 왔다. 길엔 사람들이 많았는데 누가 누군지도 모르고 줄에 섰다. 앞으로 가라면 가고 멈추라면 멈췄다. 길 옆에 잠깐 앉으면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그러다 보면 앞사람이 흔들어 깨웠고, 나도 뒷사람을 흔들어 깨우며 걸어갔다. 다리가 휘적휘적 앞으로 가는 와중에도 순간 잠이 들어 앞사람 등에 쿡 박기도 했다.      


 밤새도록 걸어서 간 곳이 지금 생각해 보니 동작동 언저리인 것 같다. 아침에 누군가 식사를 타다 주어 먹고 참호에 들어갔다. 화장실을 가고 싶은데 전부 군인들이 들어가 있어 집들 있는 곳으로 가려고 논두렁을 건너갔다. 그때 휙휙 포탄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고, 그 후에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참 뒤 일어나 몸을 살펴보니 흙투성이긴 했지만 다친 데는 없었다. 헬멧과 총이 없어 정신을 가다듬고 둘러보니 수 미터 떨어진 논 가운데 직경 5m가량 되는 큰 웅덩이가 있고 한가운데에 포탄이 꽂혀 있었다. 포탄이 돌면서 들어가는 바람에 흙덩이가 날아와서 내 머리를 쳤던 것 같은데 다행히 죽지는 않고 그 자리에서 기절했던 것이다. 화장실 갈 생각이 온데간데 없어져 참호로 뛰어 들어갔다.      


 저녁쯤 후퇴 전갈이 왔다. 등성이를 넘어가니 사람들이 밀려서 따라왔다. 영등포 뒤의 주유소를 지나 독산동까지 갔다. 헌병의 지시에 따라 옆 능선에서 영등포 쪽을 조준하고 있는데 적군이 논을 건너오면서 우리들 쪽으로 딱쿵딱쿵 총을 쏘았다. 나도 잔뜩 조준하고 쏘았지만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 알 수도 없고,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도 이미 대부분 흩어졌다. 저 아래서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며 시흥 쪽 뒷산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나도 그쪽으로 가려는데 쌕쌕이 세 대가 머리 위에서 한 바퀴 도는 것이 보였다. 급히 숨을 곳을 찾아보았지만 의지할 만한 곳까지 갈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우선 자세를 낮추고 물도 산풀도 없는 얕은 개울에 엎드렸다. 아니나 다를까 세 대가 교대로 기관총을 쏘는데 한 대가 내려와서 쏘고 올라가면 다른 게 내려와서 쏘았다.  

    

 쌕쌕이는 곧 사라졌지만 마른풀을 꼭 쥔 손이 쉽사리 펴지지 않았다. 다리도 후들후들 떨리고 쥐가 나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엉기어 일어났다가도 한 발짝도 채 옮기지 못한 채 풀썩 주저앉았다. 목전까지 다가왔던 죽음의 공포에 몸이 굳어버렸던 것 같다. 이때, 모자에 계급장도 없이 권총을 찬 사람이 호위병 같은 군인과 함께 와서 ‘너는 그쪽을 붙잡아라, 나는 이쪽을 잡을 테니’ 하더니 나를 끌고 산등성이까지 갔다. 그들은 얼마나 힘이 들었던지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 ‘여기는 안전하니 앉아서 주무르고 천천히 내려와라, 우리들은 먼저 간다’고 하면서 내려갔다.      


 앉아서 한참을 주물렀더니 조금 나아졌다. 그제야 산을 내려가는데 온통 깜깜했다. 얼마를 가니 어둠 속에서 누군가 “암호”를 외쳤다. 암호를 누구에게도 받은 적이 없다고 하니 직속상관 관등성명을 대라기에 “수도경비 사령관 육군 준장 권준, 연대장 중령 임충식, 중대장 대위 조영선” 했더니 “가” 했다. 직속상관 관등성명을 몇 번이나 하면서 산 밑에 가니 동이 훤히 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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