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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필작가 Dec 05. 2021

당신에게 쓰는 서약서

이국 하늘에서 띄운 편지(4)

대필작가의 말


기러기 아빠에 대한 뉴스를 봐도 그렇지만 가족들이 떨어져 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원하는 목표가 있어 택한 길이라 하더라도 말이지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떨어져 있는 시간이 서로의 소중함을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요. 할머니께 서약서 아닌 서약서를 쓴 저희 할아버지처럼요!


편지들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했으면 좋았겠지만 흥미로운 내용 위주로 올리다 보니 날짜들이 좀 왔다 갔다 합니다. 양해 부탁드려요!




보고 싶은 당신에게


 당신이 나를 보고 싶어 하는 만큼 나도 당신이 보고 싶소. 애들도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앞으로 3개월이면 충분히 만나게 될 것 같습니다. 나에 대한 걱정은 조금도 마세요.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만큼 정신 차리고 있는 이도 없을 겝니다. 오늘 저녁에는 빵과 깡통을 사다 먹으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잘 먹고 있으니 내 걱정은 조금도 말고 아이들 고기라도 사다 먹이면서 잘 있기를 바랍니다. 물건은 집에서 적어 보내는 선물 외에는 아무것도 안 사갈 예정이니 최대한 자세히 적어 보내세요.


 미국이란 나라는 여자 세상이기도 하고 우리나라와는 참 다른 것 같습니다(불쌍한 것은 우리나라 여성들이지요). 자기 남편이 있건 없건 다가와서 "춤출 줄 아느냐"라고 묻습니다. 모른다고 하면 자기가 가르쳐 주겠답니다. 얼마 전에는 이혼한 여자가 와서 춤을 가르쳐 주겠다고 합디다. 물론 외국에 와서 여자들과 어울리는 것이 경험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소마는 나의 마음에는, 그리고 나의 눈앞에는 당신과 숙이, 렬이, 선이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이런 경험 안 한다고 사람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우선 내 눈앞이 훤해져야만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떨어져 있어 보니 알겠어요. 노랑머리 말괄량이보다는 역시 당신이 훨씬 나아요.


 내가 이곳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당신과 처남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아주머니들 덕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딴 사람하고 결혼했다면 이런 곳까지 올 수는 없었을 겁니다. 누구보다도 당신의 공이에요. 당신 덕분에 나는 볼 것도 다 보고 경험도 많이 했어요. 이렇게 편지를 쓰는 순간에도 당신과 아이들이 기다리는 모습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과 약속했던 대로 충실한 남편 노릇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나의 부탁을 꼭 들어주세요. 아낀다고 먹을 것을 안 먹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말고 고기 사다 먹고 구경도 다니고 애들 해달라는 대로 해주면서 잘 있어 주세요. 무엇보다 건강이 제일이에요. 비행기로 올 때 기내식으로 나온 닭다리 튀김이랑 렬이 숙이 좋아하는 귤, 껌을 먹을 때마다 애들과 당신 생각을 안 한 적이 없습니다.


 이곳에 도착해서 약 24불 썼더군요. 깡통 값이 14일 동안 11불, 편지가 약 1불, 커피 약 70전 그리고 만년필을 잃어버려 3불 주고 전의 것과 똑같은 것으로 샀습니다. 저금은 170불 해 놓았어요. 당신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최대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직 봉급을 못 탔는데 타면 쓸 것만 남기고 저금해둘래요. 담배는 안 피웁니다. 술도 안 먹고요. 커피는 병째 갖다 놓고 만들어 마시는데 이제는 그것도 안 살래요. 이렇게 쓰다 보니 편지가 아니라 서약서 같군요.


 전에 부대에서 수단 부리지 않아 부식 한 톨도 못 얻어먹던 것이 기억납니다. 어디까지나 나는 정직하게 살아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하지만 거듭 부탁합니다. 돈이 들면 사촌에게 이야기해서 갖다 쓰더라도 우선 몸을 튼튼히 하세요. 나는 괘념치 말고요. 아이들도 학교 갈 때마다 용돈 주어서 보내고 렬이, 선이 사달라는 대로 사주세요. '돈도 없는데...'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아이들이 쓰면 얼마나 쓰겠어요. 내가 절약하면 되어요. 나는 다행히 절약하는 사람들을 만나 생활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나의 걱정은 조금도 말고 몸 건강히 있기를... 그리고 형님과 아주머니께도 잘 말씀드리세요.


 당신에게 서약서 아닌 서약서를 쓰다 보니 종이가 다 되었네요. 아무튼 내가 이렇게 안심하고 있을 수 있는 것은 당신이 집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젯밤에 편지를 썼는데도 또 쓰고 싶은 것은 왜일까요? 요번 토요일은 뉴욕 여행입니다. 그러면 다음 편지 있을 때까지 빠이 빠이...


1961년 5월 4일

9000마일(3500리) 밖에서 숙이 아버지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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