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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필작가 Dec 19. 2021

시끌벅적했던 고국의 하늘

이국 하늘에서 띄운 편지(5)

대필작가의 말

이번 편지를 읽다가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습니다. 매일 아침 알람 소리에 잠을 깨며 '돈이 뭐길래', 매달 월급날이면 '내 월급 빼고 다 오르네' 라던 탄식이 저만의 것이 아니었군요. 물론 할아버지의 상황은 좀 더 마음 아프고 절박한 것이었겠지만, 그 덕분에 제가 조금은 더 여유로운 세상에서 시대를 뛰어넘는 '돈타령'의 공통점에 웃음 지을 수 있는 것이겠지요. 지금 제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저 자신이 잘나서 갖게 된 게 아니라는 걸, 피땀 흘리고 눈물 쏟았던 전 세대가 있어 가능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됩니다. 더군다나 할아버지가 그렇게 내핍한 생활을 하시면서도 가족들과 친척들 선물까지 모두 챙기려고 하시는 모습을 보니 더더욱 와닿네요.


모든 부모님,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


덧, 최근 몸이 좋지 않아 좀 게을러졌었습니다. 요새는 조금만 컨디션이 안 좋아도 덜컥 겁이 나는 세상이네요. 할아버지 편지의 말미에 늘 따라붙는 인사말처럼, 다들 건강하시길 축원합니다.




숙이 엄마에게


  언제나 나를 위해 준 당신 덕분에 한 번도 오기가 힘든 영광스러운 곳에 두 번씩이나 오고 보니 이곳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게 생각됩니다. 한 시간에 550마일이나 가는 비행기(제트기)로 땅에서 30리가량 높이로 165명이 탔습니다. 민간 항공기를 군대에서 전세 낸 것이랍니다. 비행기에서 식사가 나왔는데 우리 률이가 먹고 싶어 하던 귤이 젤 먼저 나왔습니다. 곧 돌아가는 일정이면 먹지 않고 가지고 가서 률이를 좋아하게 하련만 하는 생각이 났습니다. 전에 어른들이 맛난 음식을 두고 자식 생각에 목이 메어 안 넘어가더라고 하던 말이 이해됩니다. 비행기 타려고 나올 때 '아버지 안녕히 다녀오세요' 하던 률이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합니다. 돈이 무엇인지...


 하도 쓸 말이 많아서 무엇부터 써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우선 누구보다도 요란하게 출영해 주신 어른들과 조카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아저씨 아주머니 그리고 형님과 숙자, 차 서방 명철이 인철이 미자 모두 고생들이 많았지요. 어머님이 병환이나 나시지 않았는지요. 갈 적에 꼭 좋은 선물 가지고 갈게요. 비행기 타고 나서도 여전히 렬이, 숙자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보였어요. 무의식 중에 손을 흔들다 보니 밖에서는 안보일 텐데 나만 혼자 열심히 인사하고 있던 것 같아 옆사람 보기가 조금 민망스러웠어요. 그 사람들은 밖에서 안이 안 들여다 보이는 걸 알고 있지 않겠어요?  


 김포서 일본까지 1시간 반 걸리고 일본 하네다에서 비행기 안에 1시간 있다가 다시 떠서 시애틀이라는 데 오니 밤을 지나 다음날 12시가 되었어요(계산을 해보니 9시간 반). 전부 해서 12시간가량 걸렸네요. 비행기 안에서 우리 가족들 자랑하다가 에아 걸(비행기 안에서 손님들에게 서비스하는 사람)에게 사진을 보여줬더니 예쁘다고 하면서 숙이와 선이에게 갖다 주라고 에아 걸 배지 2개, 렬이와 률이 주라고 비행기 사진엽서 두 장이랑 고무풍선 네 개를 주어 받아 두었습니다. 잘 두었다 가지고 갈게요.


 큰 형님 쓰시던 면도칼을 가지고 와서 황송해요. 하나 사서 올리도록 하세요. 숙이가 물감을 사다 달라고 했는데 아직 못 샀어요.  물건들은 다 좋은데 조금 비싸요. 1/4 캐럿짜리 다이아 반지 가격을 물어보았더니 200불 간다니까 우리 돈으로 치면 5만 4천 원가량 될 것 같습니다. 시계는 최하가 4천 원 정도 해요. 그래도 두 번 다시 오기는 힘들 것 같으니 다들 하나씩 해주는 방향으로 해봅시다. 기회 있는 대로 수열 숙자 명철 명자한테 선물 자그마한 것이라도 하나씩 할터이니 이야기하라고 해서 알려주세요. 종철이랑 종석이한테도 뭐를 원하는가 알아보시고요.  천은 아직 못 봤는데 보는 대로 사서 부치도록 하겠습니다. 상욱이가 이야기하던 기타는 최고가 270불로 텔레비전보다도 비싸고 무거워요.  그리고 상욱이 친구 사는 곳은 여기서 차로 2시간가량 가면 된답니다. 기회가 닿는 대로 가본다고 전하세요.


 교육은 15일부터 시작하였어요. 거기는 16일이겠죠? 밤에 잠이 안 와요. 오늘 저녁부터나 잘 잘 것 같습니다. 비자 관계로 쩔쩔매다가 어리둥절하게 떠났는데 여기 오니 김, 전 중위 두 분이 반갑게 맞아주셔서 마음이 놓였어요. 이곳은 아직도 겨울이에요. 눈이 있고 아침저녁으로는 춥지만 밖에서 할 일이 없고 어데 가면 차 타고 가게 되어 안 추워요. 다른 건 다 좋은데 식사를 일절 못해 먹게 해서 돈 드는 게 말이 아니에요. 하루에 식사 값만 약 2불가량 들어가요. 어디를 가도 언어는 잘 통해서 괜찮은데 식사를 꼭 사 먹어야 하니 걱정입니다. 방값으로는 2달분 34불 냈어요.


 이곳에 오니 목에 걸고 다니는 시계가 유행이군요. 목걸이로 말이에요. 사고 싶은 것은 많고 돈은 없고 야단 났어요.  모든 것이 전보다 올랐는데 수당은 오르지 않았어요.  그러나 차차 나아질 것이니 집에서는 걱정 말고 형님한테 이야기해서 돈을 꾸어다 애들 고기랑, 특히 률이 귤 좀 꼭 사다 먹이고 다음 편지에 알려 주세요. 어머니와 온 집안 어른들께도 내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마시도록 말씀드려 주십시오. 아무쪼록 몸 건강하기를 축원합니다.


1967년 3월 17일(그곳은 3월 18일),

9  타국에서 숙이 아범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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