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대필작가 Feb 22. 2022

잠시만 안녕

이국 하늘에서 띄운 편지(8)

대필작가의 말


(할아버지가 직접 하나하나 소리내어 댓글을 읽어보셨답니다 :)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코로나가 가히 창궐하고 있는데 댁내 평안하신가요. 저는 이제 설도 지났고 올림픽도 지났으니 빨리 진짜 봄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올해 설에는 할아버지와 함께 그간의 댓글도 다시 하나하나 읽어 보고 작품 구상(?)도 했는데요. 제가 듣기에는 흥미로운데 할아버지는 별 거 아니라고 안 쓰셨던 내용들이 꽤 많아서 다시 정리해 보기로 했습니다. 속도가 조금 더디더라도 양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아마 편지는 새로운 것을 찾지 않는 한 이번 편이 마지막이 될 것 같아요. 그동안 할아버지의 비밀 상자를 열어보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조금 아쉽습니다. 내용이 많지 않으니 가볍게 읽어 주셔요. 아직 저희 할아버지의 집필이, 그리고 저의 대필이 끝나지 않았다는 소식을 전해드리면서 이만 물러갑니다 :)






1.

빨리 날아가라 비행기야, 내 고향 원경한테로...


 매우 궁금했지요? 덕분에 무사히 목적지인 이 학교에 도착하였습니다. 다행히도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박 대위님을 만나서 같이 식사도 하고 신세를 많이 지고 있어요. 여러 가지로 많이 가르쳐 주셔서 매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저는 5일간 아무 어려움 없이 재미있게 태평양을 건너서 미 대륙으로 왔어요. 아버지, 어머니를 비롯한 형님들 모두 안녕하시고 숙이, 렬이, 선이 다 잘 노는지요? 아주머니는 좀 어떠하신가요? 편치 못하신 몸으로 김포까지 오시느라고 고생하셨는데...


 떠나올 적에 어머니를 위시하여 형님들이  분도 빠짐없이 전송하여 주셔서 이루 말할  없이 기뻤습니다. 다만 숙이가 없었고... 쫓아온다고 발버둥치는 렬이 모습을 보니 마음이  섭섭했습니다. '아버지, !' 하며  내밀던 애들이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10환짜리밖에 모르면서도   먹게  달라면서  내밀던 선이, 아버지밖에 모르던 렬이 그리고 좋아도 싫어도 반가워도 내색하지 않는 우리  따님 보고 싶을 적마다 창경원에서 찍은 사진을 보곤 합니다.


 밤에 영 잠이 오지를 않는군요. 미국은 돈만 있으면 지상 낙원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친절하고 어린애들처럼 자기 칭찬만 해주면 좋아하면서 '땡큐'를 연발합니다. 날씨는 비슷해요. 살 물건은 많으나 너무 물가가 비싸서 가는 길에 일본에서 살 예정이니 모두 물어보아 한 가지 씩이라도 적어 보내세요. 일본에서 보니 구두가 상당히 눅더(*싸더)군요. 어머니 옷감은 물어보니까 약 4만환 듭디다. 애들 장난감도 상당히 눅어서, 갈 적에 짐이 많지 않으면 사 가지고 갈 예정입니다. 또 수열 아버지 보고 여기 낙타 모자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으니 미도파나 동화 백화점에 가셔서 어느 회사의 어떤 물건인지 알려 달라고 하세요.


 애들 데리고 고생하는 당신과 여기서 호강하는 미국 여성들을 보면 참 가련한 것이 한국 여성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쪼록 고생하지 말고, 애들이 좋아하니 수열네 집에서 돈을 꾸어다 일주일에 두세 번 고기라도 사다 먹으면서 몸성히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조금도 불편함이 없어요. 자주 소식 전하겠습니다. 안녕히...


당신의 것으로부터.



2.

 그리운 당신에게


 그간 애들 데리고 얼마나 고생이 많으시오? 안에 형님네 내외분께서도 안녕하시고 숙자도 잘 있지요? 종철이 숙이 학교 잘 다니고, 종선이, 렬이, 선이 다 잘 노는지 궁금합니다. 신당동 댁과 4가 형님 댁도 다 안녕하신지요? 일전에 용산 8군에 있는 미군이 다녀간 줄로 압니다. 오늘 저한테 편지를 했더군요. 우리 아이들을 만났고 당신이 매우 공손하고 예절 바르더라면서, 날 보고 참 좋은 가정을 가지고 있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사람 보는 눈은 다 비슷한 모양이에요. 모든 것이 당신 덕분이지요.


 편지를 드문드문하려 했다가도 우체국만 보면 또 쓰고 싶은 마음에 늘 지고 맙니다. 왜일까요? 한 달에 두어 번 답장을 받겠거니 했다가도 내 편지통에 갈 때마다 행여나 하는 생각에 설레는 건 왜일까요... 당신도 내가 당신 보고 싶은 것만큼 나를 보고 싶어 할 줄 압니다. 앞으로 약 반 달만 있으면 실컷 볼 수 있으련만 말이지요. 아마도 8월 초순에는 집에 들어갈 것 같습니다. 불과 두 달밖에 안 지났건만 벌써 몇 년이 지난 것 같은 기분입니다. 더 있으래도 못 있을 것 같아요. 얼마간 있어보니 우리나라 이상 좋은 곳은 없다는 신념이 강해집니다.


 사고 싶은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나 워낙 물가가 비싸서 엄두가 나지를 않아요. 일전에는 생각다 못하여 340불 주고 재봉틀을 좋은 것으로 하나 샀다가 도로 물렀습니다. 전기다리미는 10불 주고 하나 사 가지고 지금 쓰고 있어요.


 미국에서 보고 들은 것을 이야기하려면 한이 없겠으나 한 가지만 적어볼까 합니다. 한 여자는 군인인 남편이 불란서(*프랑스)에 가 있는 새에 다른 남자와 놀아나서 애를 가진 지 넉 달이랍니다. 그런데 휴가를 맡아서 집에 온 남편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데요. 우리나라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지요. 만약 남자가 다른 여자와 놀면 대뜸 혼나지만 여자가 그러는 것은 보통이라고 하니, 그만큼 미국에서는 여자가 높은 위치에 있는 셈이지요. 어느 날엔가는 남자들이 죽 의자에 앉아 있다가 여자가 앞으로 오니까 모두 벌떡 일어서서 에스코트하는데 기가 막히더군요. 이 세상에서 여자로 태어나려면 미국에서 태어나야겠다 싶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만 더 해줄게요. 어떤 미국 사람 집에 갔는데 거기 15세, 16세 그리고 18세 딸들이 있었어요. 그 어머니가 나에게 하는 말이 18세짜리 애가 남자 친구하고 어제 놀러 나가서 자고 지금 들어오는 길이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한국도 그러냐고 묻기에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일이 없다고 했더니 어머니와 아버지가 반색을 하더라고요. 부모가 제 딸에게 '봐라, 한국 같은 나라엔 그런 일이 없다지 않냐?'라고 하니까 얘가 입을 삐죽하며 자기 아는 애는 16세인데 벌써 남편을 얻어서 살림을 차렸다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16세에 비하면 저는 이미 나이가 들었다는 말이겠지요. 개방적인 미국도 부모 자식 세대 간의 의견 차이는 어쩔 수 없구나 생각하니 우습더라고요.


 이밖에도 당신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하지만 특히 부탁하고 싶은 것은 아무쪼록 애들 데리고 고생하지 않고 살기를... 그리고 이다음 편지할 때에는 될 수 있는 대로 글씨를 조그맣게 써서 한참 오래오래 읽도록 해 주세요. 아저씨랑 뒷집 정자네한테도 안부 전해 주시고요. 일전에 여깃돈으로 50전 주고 참외를 한 개 사다 먹었는데 우리 것만 못하더군요. 참외를 먹으니 당신과 애들 생각이 몹시 났습니다. 서울에도 지금쯤은 참외가 나왔을 테지요? 좀 사다가 애들 먹이고 당신도 먹도록 하세요. 애들 용돈 줄이지 말 것 또한 부탁합니다. 그러면 다음 편지할 때까지 빠이 빠이...


 서울의 맑은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당신의 것으로부터.




이전 29화 형님 전 상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