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생채. 아직도 용어가 익숙하지 않다. 어렸을 때 무채지, 채지라고 들었기에 '무생채'라고 하면 맛이 반감되는 기분이다. 오늘은 무채지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엄마가 어렸을 때 만들어주시던 무채지는 기억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소울푸드다. 엄마에게는 더 이상 물어볼 수 없어 시어머님께 만드는 방법을 여쭤봤다.
매일 도시락 2개를 싸서 직장에 간다. 퇴근 후에 따로 하는 일이 있어서다. 사내 식당 음식은 칼로리가 높고, 밖에서 사 먹는 건 돈과 시간이 아깝다. 그래서 아침에 아이들 식사 챙겨주고 남는 반찬에 간단히 도시락을 싸간다. 냉장고 음식이 과잉이라 절약하는 기분도 든다. 집에서는 맛없는 음식도 직장에서는 맛있다.
최근에 어머님께서 가르쳐주신 무생채와 두부 반찬에 도시락을 싸서 다녔다. 매일 도시락을 2개씩 싸다 보니 설날에 무생채를 담았음에도 다 먹었다. 무 1개를 소비하는데 일주일이 걸렸다. 혼자힘으로 무생채 만들기 복습을 하기로 했다.
퇴근하고 장보고 있다는 남편에게 무 1개와 맛소금 작은 포장을 사 오라고 부탁했다. 집에 이미 굵은소금, 꽃소금이 있지만 어머님께서 맛소금을 쓰셨기에 부탁했다. 남편이 저돌적인 내 요리 스타일을 알기에 겁이 났나 보다. 무생채 대신 김장김치를 먹는 게 어떠냐고 제안한다. 다음날 식탁에 얌전히 놓여있는 무와 맛소금을 발견했다. 겁이 났나 보다.
어머님표 무생채는 강력한 특징이 있다. "아삭함"이다. 이유를 모르겠는데 마지막 한입까지 아삭하다. 그 아삭함이 맛을 배가시킨다. 전라남도에서는 사람들이 황석어젓, 밴댕이 젓, 새우젓까지 모두 손수 담아 요리에 응용했다. 풍미가 가득한 김치에 익숙해서인지 서울 쪽 김치는 밋밋해서 처음에 적응을 못했다. 세월이 지나 서울 김치만의 매력을 찾았다. 맛이 깔끔하고 색이 곱고 아삭하다. 서울김치 특유의 아삭한 깔끔함이 있다. 시어머님표 김치가 그렇다.
부엌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마치 의식을 치르듯 식재료를 준비했다. 자주 보는 요리 유튜버 콘텐츠는 김대석 셰프, 비룡, 딸에게 주는 레시피, 전라도 아따 할매, 마카롱 여사 등등 많다. 그들의 레시피를 섞고 섞어 새롭게 도전해 보는 것에 흥미도 가졌었다. 올해는 머릿속 지식을 다 버리고 뭐든 새로 배우려는 마음가짐이기에 딱 시어머님이 알려주신 대로만 배워보려고 한다.
[무생채 재료]
고춧가루, 맛소금, 설탕, 무 1개, 멸치액젓, 통마늘 8개, 대파 2대 끝.
1. 무 양끝 바짝 짧게 썰어내어 버리기
무 1개에 지난주까지 1980원이었는데 2500원이다. 아주 얇게 낭비 없이 양끝을 잘라내 버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무껍질을 벗기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런데 남편이 사 온 무의 몸통에 검은 게 있다. 다음에 무를 고를 때는 몸통이 깨끗한 걸 골라야겠다. 필러로 몸통 부분 부분 검은색만 조심히 얇게 벗겼다. 시어머님의 낭비하지 말라는 조언이 귓가에 맴돈다.
2. 채칼을 활용하여 무 썰기
넓은 통을 바닥에 놓고 채칼을 올려놨다. 나중에 깨달은 사실이지만 통은 무보다 5배 이상 큰 크기여야 흘리지 않고 좋을 듯하다.
손 다치니 통째로 들고 비스듬히 측면부터 갈라고 한 기억이 난다. 비스듬히 갈다 보니 무채가 길게 뽑힌다. 아삭함이 장점이니 짧지 않고 길게 나와도 괜찮다.
거의 갈고 나니 무의 1/7 정도가 남는다. 내 손은 소중하므로 그것은 나중에 요리할 때 쓰거나 핑거푸드 야채스틱으로 먹어볼 생각으로 멈춘다.
3. 무에 빨간 물들이기
무 1개당 고춧가루 3~5숟가락을 넣어 미리 빨간 물을 들이신다고 하셨다. 설날 사용했던 무보다 크기가 살짝 작은 듯하여 고춧가루 4스푼만 넣고 골고루 빨간 물을 들여본다.
4. 채소 썰기
채소라고 해봐야 대파 2대, 마늘 8개만 넣는다. 대파는 최대한 얇게 어슷 썬다. 무채지를 먹을 때 대파가 두꺼우면 매콤한 대파가 맛을 방해할 것 같아서다. 마늘은 다져서 한 수저 반을 넣으라고 하셨으니 어림잡아 8개를 다져본다.
5. 추가양념과 야채 섞어 버무리기
다진 마늘, 대파를 넣고, 맛소금 1스푼, 액젓 세 스푼, 설탕 세 스푼을 넣어 골고루 버무린다. 다 한 후 어머니께서는 맛을 보시고는 양념을 추가하신다고 한다. 이제까지의 계량이 무색해질 정도로 맛소금 1스푼, 액젓 3스푼을 더 추가하셨다. 나는 액젓 3스푼만 추가해 본다. 오래 두고 먹을 것도 아니고, 짜면 수습이 어렵지만 싱거우면 수습이 가능하다는 판단에서다. 싱거우면 계란프라이, 참기름, 무생채, 다른 김치나 고추장 넣고 밥 비벼 먹으면 그만이다.
아 그리고 어머님께서 용기에 무생채를 담을 때에는 용기 모서리에 공기 공간을 남기지 말고 무생채로 꽉꽉 채워 꾹꾹 눌러 담으라고 하셨다.
끝. 뿌듯하다.
어머님께 가르쳐주셔서 감사하단 메시지와 어머님 김치중에 남편과 아이들이 홀릭하는 다른 김치들인 겉절이, 냉면 무김치, 깍두기, 총각무김치를 배우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앞으로 하나씩 가르쳐주신다고 한다.
대학졸업 이후 일을 쉬어본 적 없다. 항상 직장 업무로 바빴기에 그동안 어머님 김치를 배우지 못했다. 여든이 넘으신 어머님께서 계속 배워보라고 했는데 이제야 하나씩 배워보려는 마음이 생긴다. 물론 올해도 일로 바쁠 예정이다. 미루다가는 영영 못 배울 듯해서 올해는 유튜브가 아닌 어머님께 배워볼 생각이다.
어머님은 무뚝뚝한 T형 곰과 며느리의 이모티콘을 오늘 처음 받아보시고 놀라셨을 것이다. 아무래도 일주일에 무 1개씩 끊임없이 무생채 반찬을 만들듯 하다. 그리고 도시락 반찬으로 무생채는 꼭 싸갈 것이다.
나도 이제 퇴근길에 가볍게 무 1개 사서 반찬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