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직장 휴가를 냈다. 애들과 남편은 내가 출근한 줄 안다. 아침에 일어나니 남편이 동태탕을 끓여놨다. 엊그제 재래시장에서 꽁꽁 언 동태 한 마리를 사 오더니 오늘 새벽에 실행했나 보다. 동태탕 양념을 따로 샀냐고 물으니 유튜브 보고 배합했단다. 요리실력이 일취월장이다.
근데.... 이거 언제 다 먹지? 동태찌개 한솥을 베란다 차가운 곳에 두더니, 작은 냄비에 덜어 끓인다. 베란다가 시베리아라 상할일은 없어 보이지만, 며칠 동태탕 소진을 목표로 해치워야겠다. 남편이 동태의 뼈를 다 제거하고 살코기만 남겨놨다. 모양은 볼품없지만 알과 고니를 넣어 시원한 알탕맛이다. 글 쓰면서 깨달았는데 또 '술안주'를 만들었다.
남편은 아침 7시에 출근하고, 나는 집에 남겨질 아이들을 위해 점심 도시락을 쌌다. 얼마 전 요리책을 보고 만들어둔 소고기 메추리 장조림을 메인 반찬으로 놓고 김치, 계란프라이를 추가했다. 밥도 퍼놨다. 밥을 퍼놔야 한다. 밥 뜨는 찰나에 귀찮다고 불닭볶음면이나 까르보나라 컵면을 먹으려 들것이다. 애들은 학원 스케줄대로 아파트 단지 근처를 빙빙 돌며 움직일 것이다.
애들 점심도 싸놨으니 이제 직장 가는 척 도시락을 싸서 나만의 아지트로 향한다. 스터디카페를 200시간씩 계속 끊어서 직장 외에 쏟아지는 프로젝트의 작업 공간으로 사용해 왔다. 이번 달부터는 개인 고정석을 끊어 이용해 보기로 했다. 주로 퇴근 후 가족식사를 하고 스카를 이용하는데, 무거운 가방과 모니터를 들고 다니기가 힘들다. 30대 때 "네 하루는 48시간이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에너지가 넘쳤지만, 지금은 몸을 사려야 한다. 중고등학생들 시험기간에는 퇴근 후 스카 자리 차지하기도 힘들어 집으로 되돌아간 적도 있다.
28일이 고정석 사용 주기인데 할아버지 사장님께서 특별히 35일이나 넣어 주셨다. 고정석을 이용하니 비로소 나만의 아지트 같다. 무엇보다 대형 모니터를 들고 다니지 않아서 좋다. 토, 일, 월요일 스카에 머물면서, 끊김 없이 한 가지 생각과 작업에만 몰입해 보니, 행복하다.
직장 외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자주 참고하는 관심분야 책들도 정리해 두었다. 대학 졸업 이후 계속 직장생활을 해왔다. 직장 외 프로젝트도 계속했으니, 병행하는 생활이었다. 요즘은 직장생활 안 하고 관심분야의 자료만 소설책처럼 읽으며 유유히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다. 닭 키우고 텃밭을 가꾸면 공부만 하고 살아도 충분히 자급자족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닭장은 머릿속에서 열번도 더 지었다. 자연인으로 살고 싶다.
무엇보다 남의 의뢰에 거절의사를 야무지게 밝히며 '내 마음 내키는 프로젝트'에만 참여하고도 싶다.
'나는 자연인이다'를 외치고 속세를 떠나기에는..... 초등학생 중학생 애들 학원비도 벌어야 하고, 아파트 중도금도 꼬박꼬박 내야 한다.
공부는 주말과 퇴근 후에 몰래 자연인처럼 하는걸로.
앞서 가는 방법의 비밀은 시작하는 것이다.
- 마크 트웨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