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농사 준비
오후 5시쯤, 두통이 있었다. 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두통이랄까. 지하주차장에서 잠시 고민한다. 이대로 컴퓨터 문서 작업을 할까? 죽어도 하기 싫다. 잠을 제대로 못 잤는지 찌뿌둥하다. 가고 싶은 곳이 딱 한 곳밖에 없다. 그곳에 가면 두통이 씻은 듯 나을 것 같았다.
그곳은.. 텃밭! 그냥 가고 싶다. 뭐 하루 농땡이 피운다고 지구가 끝날 것 같지 않다. 자가용의 핸들을 틀어 텃밭으로 향한다. 조심조심 운전한다. 남편이나 애들에게 들킬세라 살금살금 운전해 산밑 텃밭에 도착한다.
가을 농사를 위해 감자와 쌈채소를 수확한 빈자리를 정리해야겠다. 잠시 텃밭 앞 주차장에서 '밭두둑 만드는 법'에 대한 유튜브를 찾는다. 설명이 너무 길다. 딱 필요한 정보만 입수하기 위해 이리저리 돌려보지만, 참기 힘들다. 에라 모르겠다. 직관적으로 해보기로 했다.
텃밭 농기구 보관처에서 필요할 것 같은 연장 3개를 챙긴다. 이름이 뭔지도 모르겠다. 삽, 갈퀴처럼 생긴 것, ㄱ자 주걱 같은 것. 어떤 용도로 쓰는지 모른다. 감각으로 사용방법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제일 먼저 ㄱ자 주걱으로 밭의 가장자리를 직선으로 파나간다.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붓글씨를 배웠다. 이제야 덕을 본다. 단숨에 획을 긋듯 직선으로 땅을 판다. 그런 후 흙을 긁어 올린다. 흙을 한 삽씩 떠서 뒤집는다. 왼발로 삽의 어깨를 지그시 누른다. 두 손으로 삽을 잡고 왼쪽 발목에 힘을 실어 75도 사선으로 내리꽂는다. 땅이 촉촉해서 가볍게 떠진다. 천하장사가 된 기분이다. 그런 후 뾰족한 송곳니가 10개는 달린 10지창 같은 도구의 등을 이용해 흙뭉치를 으깬다. 흙을 밀고 당기며 두둑의 수평을 맞춘다. 뭔가 그래야 할 것 같은 순서로 작업했는데, 어느새 밭두둑이 완성되었다.
퇴비포대를 개봉하여 거꾸로 잡고 직선으로 뒷걸음질 치며 두둑 중앙에 퇴비를 쏟는다. 10지창 도구로 슬슬슬~ 퇴비를 고르게 펴 바른다. 마치 식빵 위에 쨈을 바르듯. 한 치의 오차 없이 수직이 맞는지 바로 잡아본다. 이제 3일간 퇴비의 가스가 빠지기를 기다려 비닐멀칭을 할 예정이다. 핀으로 꼽는 방식이기에 그 작업도 큰 수고로움 없이 혼자 가능하다.
모든 작업이 끝나면 왼쪽과 오른쪽 밭고랑에 잡초매트를 깔 예정이다. 바쁜 직장맘이라 잡초를 허락할 여유가 없다. 농사 시작 초반에 매트를 깔아야겠다. 잡초매트를 소재별로 비교분석하여 올이 풀리지 않고 빗물 흡수가 잘되는 천 재질로 구입해 뒀다.
근데 작물은 뭘 심지? 종묘사에 가봐야 알겠지만, 나름의 원칙만 세워본다. 투입 대비 가성비 있을 것, 평소 자주 활용하는 식재료일 것, 새 작물에 호기심이 생긴다고 실험하지 말 것. 쿠크다스 멘탈이라 벌레가 꼬이지 않는 작물일 것. 정도다.
당근? 조금만. 대파? OK, 배추? OK, 무? OK, 공심채 OK, 상추 조금만, 깻잎 2개만, 여름 시금치 OK....
루꼴라, 쪽파, 바질, 열무는 NO. 남이 잘 기른 농작물을 사 먹는 게 낫다.
애호박과 오이의 불필요한 줄기와 잎 정리, 고추, 깻잎, 가지, 방울토마토에 웃거름 주기. 마지막으로 고구마순을 수확했다. 애들이 생애 처음 먹어본 고구마순 김치를 너무 좋아한다. 고구마순 김치를 또 만들어볼 생각이다.
작년과 올해, 농사를 지으며 새롭게 터득한 게 하나 있다. 가을 농사를 위해서는 빨리 수확하는 작물과 늦게 수확하는 작물을 분리 재배해야 한다는 점과 햇볕을 골고루 받아 작물이 잘 자라게 하기 위해 키 큰 작물과 키 작은 작물을 분리 배치 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10평의 텃밭에 작물 배치 순서는 가장 먼 위치부터 오이 애호박 - 고추 - 가지 - 깻잎 -고구마- 땅콩- 대파 - 감자- 쌈채소 - 부추 순으로 심어야 한다. 부추를 가장자리에 심는 이유는 한번 심으면 평생 수확이 가능하기에 밭을 재정비할 때 땅의 초입인 부추 구역만 빼고 하면 편하다.
텃밭에서 고구마순과 깻잎 등을 다듬다 보니 7시 40분 정도가 되었다. 해는 졌는데 밝다. 채소를 다듬고 있으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엄마는 밭에서 혼자 일하시다 항상 칠흑같이 어두울 때 귀가하셨다. 해가 뉘엿뉘엿 졌을 때 밭에서 어떤 마음이셨으려나. 오늘의 나처럼 편안함을 느끼셨으려나, 고단함을 느끼셨으려나. 6남매 키우시며 낮에는 농사짓고 저녁에는 간병하셨으니, 고단함을 느끼셨으려나.
고구마순 껍질을 까다 보니 '손톱밑이 까만 엄마손'이 되었다. 네일아트보다 더 예뻐 보인다. 오래오래 까만 물이 안 빠졌으면 좋겠다.
귀가하여 고구마순의 껍질 벗기는 작업을 이어갔다. 잎 부분을 꺾어 최대한 껍질을 벗기고, 다시 잎 부분의 끝을 꺾어 나머지 껍질을 벗긴다. 마지막으로 고구마순의 허리를 꺾어 남은 껍질을 벗긴다. 짜그락거리는 특유의 식감을 살리기 위해 끓는 물에 데치지 않고, 소금에 절여 김치를 만들 예정이다.
고구마순 껍질 벗기는 작업 분량 10% 남겨두고 있었는데, 남편이 안 자냐고 쳐다본다. 곧 째려봄으로 바뀔 거다. 어쩔 수 없다. 자야겠다. 이건 남편의 술이나 담배처럼 기호 취미인데...
확실한 건 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두통이 없어졌고, 잠을 잘못자서 찌뿌둥한 기운이 없어졌다. 땀을 흘리고 샤워했더니, 아주 개운하다. 몸을 움직여 땀을 흘리는 것, 내겐 만병통치약이다.
고구마 순 김치는 내일 담자. 오늘 안 담는다고 지구가 끝나지 않는다. 앗. 노동에 심취해 저녁식사를 안 했구나. 밥 먹는 것도 까먹었다. 배고프다. 그냥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