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생각한다. 이미 인생은 정해져 있는 길을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아등바등할 것 없이 그냥 몸을 맡기고 둥둥~ 떠가면 되는 거라고.
나는 청소년을 만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 직업을 가진 지,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다. 만족하고 있으며, 나에게 더 큰 권력의 자리를 내어준다고 해도 바꾸고 싶지 않다.
대학에서 주전공으로 프랑스문학을 공부했다. 불문학이 너무도 좋아 고교 선생님들의 만류에도 주전공으로 택했다. 전공 선택도 내가, 책임도 내가 지면 될 일이었다.
당시 워드프로세서 자격증쯤의 개념으로 복수전공 자격을 따놓았다. 4년간 2개의 서로 다른 단과대학의 전공을 하느라 남보다 두 배는 뛰어다닌 듯하다. 지금은 프랑스어가 아닌 복수전공으로 밥을 벌어먹고 있다. 사람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물론 고집이 센 편이라 첫 직장은 주전공과 연결하여 가졌다. 4학년 1학기를 마치자마자 강남쪽 프랑스 관련 무역회사에 취업한 것이다. 당시 면목동에 있던 사원 아파트에 거주했었고, 아직 대학 졸업 전이었던지라 회사에서는 막내인 나를 이리저리 출장을 보냈었다. 덕분에 삼성역 무역센터, 양재역, 강남역 등을 서류봉투 들고 미친 듯 뛰어다녔다. 세네갈 바이어도 만나고, 중국 공장들도 둘러보는 출장을 나갔다. 선배들은 통관서류 작성으로 인해 항상 어깨에 파스를 붙이고 있었다.
한참 무역회사 업무에 적응해가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고등 동창으로부터 연락이 왔었다. 프랑스어 문서를 번역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기꺼이 수락하고 약속장소로 나갔다. 만나자마자 번역 일거리를 붙들고 끝내고 올참이었다. 그런데 약속장소에는 친구와 한 무리가 또 있었다.
번역일이 아니고 어떤 제품 설명 강연회를 들어달라는 부탁이었다. 다단계였다. 고교시절 전교 5등 안, 아니 전교 1, 2등을 하던 수재였던 친구다. 다단계에 빠진 것이다. 친구부탁으로 하루 종일 강의를 들었다. 나 말고도 그렇게 끌려와 강의장에 감금된 사회 초년생들이 30명은 돼 보였다.
해질 무렵, 친구에게 강의 그만 듣고 싶고, 만나서 반가웠으며, 잘 지내라고 인사하는데 옆에 있던 무리들이 나를 막아섰다. 일주일정도 합숙을 하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라고 했다. 절대 강의장 밖으로 나를 내보낼 생각이 없는 듯했다.
몸싸움 끝에 겨우 길거리로 빠져나왔는데 20대 청년이 나를 다시 강의장으로 끌고 가려했다. 하~참. 이제껏 내 의지대로 살았는데, 내 의지가 아닌 장소에서 강의를 강제로 듣게 하다니, 참을 수 없었다.
발끝으로 정강이를 부러져라 찼고, 뺨을 사정없이 때렸다. 그냥 너 죽고 나죽자는 생각이었다.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몸싸움이었다. 남자의 귀에서 링귀걸이가 직선으로 내려오며 귀가 그대로 찢어졌다. 고통은 작았겠지만 검은 피가 귀에 범벅이 되어 주변인들이 호들갑이었다. 다른 쪽 발목과 무릎사이를 있는 힘껏 발끝으로 차고 겨우 도망쳐 나왔다. 떼굴떼굴 굴렀다. 발야구로 홈런을 날렸을때보다 더 세게 찼다. 중고등 시절 발야구로 익힌 발끝 차기가 이럴 때 쓰이다니.
죽을힘을 다해 용마산역에 도착했고, 사원아파트에 누워 천장을 봤다. 그대로 하루를 보냈다. 하루가 지났는데 온몸에 통증이 더 심하게 왔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고, 움직일 수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게 물파스밖에 없었다. 아픈 곳에 물파스를 바르다 보니 그제서야 눈물이 났다. 입에서 욕도 튀어나왔다.
무역회사에서 주전공 특기를 살려 서울 생활 첫발을 시작해보려 했는데, 별 그지 같은 경험이었다. 착하고 똑똑한 친구가 다단계에 빠져들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지만, 내 인생이 더 안타까워 보였다. 달력을 보니, 2월 졸업식이 얼마 안 남아있었다. 무역회사 선배들의 어깨에 붙여진 흰색 파스가 떠올랐다. 내 미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히 졸업식에 참석하고 아버지 간병을 시작했다. 광부셨던 아버지는 진폐증을 앓고 계셨고, 큰 산소통을 끌고 다니셨다. 폐에 석탄가루가 쌓인 병이라고 했다. 1년 정도 지극정성으로 간병했는데, 연로하신 상태에서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복수전공으로 취업시험을 준비해서 지금의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아버지의 병실에서 밥상 놓고 공부했었는데, 아버지는 항상 공부하는 내 모습을 TV처럼 바라보셨었다.
합격 소식을 전해드릴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산소 호흡기를 꼽고 계시면서도 6남매 중 막내딸이 공부하는 모습을 좋아하셨다. 아마 아버지도 내가 곧 취업의 문을 뚫고 말 것이라는 걸 짐작하셨을 거다. 프랑스어를 사랑하는 직장인이 되었다. 이후 쭉 한 직무분야에서 정책 연구 등에도 참여하며 근무 중이다.
북한이 우리나라 청소년 무서워 쳐들어오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아주 가까이에서 목격하고 있는 내 입장에서 청소년을 한마디로 정의하라고 한다면, "청소년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존재다." 초기에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했다. 진짜 모든 면에서 불가능을 가능케 해서 신기했기 때문이다.
자식을 낳고 우리 집 아이들이 청소년이 되고 보니, 중의적인 의미가 추가되었다. 정말 우리 집 자식들은 여러모로 불가능을 가능케 한다. 직업인으로서, 부모로서 불가능을 긍정적 방향으로 틀어주는 게 역할 같다.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단, 외계인에게 진마음으로 대하면 그들도 진마음으로 대해준다.
그냥 그렇다.
8월의 초입에 감기약을 한주먹 털어 넣고 작은 기억을 꺼내 문자로 바꿔 기록해 본다. 비몽사몽이다. 빨리 회복해서 일해야 하는데.. 오늘은 쉬었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