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0시 30분, 가족이 모두 잠자리에 들고, 비로소 내 자리에 앉았다. 책상에 앉을 정신은 없고 그냥 널브러져 밥상 앞에 앉았다. 내 시간이다. 손이 부르텄다.
퇴근 후 장보고 집 도착,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음식 만들기, 큰 아이 밥 차려주고 학원 보내기, 설거지, 냉장고 선반 닦기, 일반쓰레기와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 쓰레기통 씻어서 말려두기, 거실 청소, 고양이 케어, 학원에서 돌아온 둘째 아이와 남편 밥 차려주기, 둘째 아이 수학 숙제 확인과 영어 단어 시험 봐주기.
한숨 돌리며 집 앞 메가커피에서 커피 주문-정신없이 주문한 나머지 뜨거운 아메리카노 테이크 아웃 --;, 혼자 마시기 미안해서 배스킨라빈스에서 아들의 '엄마는 외계인', 딸의 '아몬드 봉봉' 테이크 아웃. 다시 집, 거실 고양이 털 제거, 밤 9시 30분에 학원에서 큰 아이 귀가, 양치 지도.
직장맘의 저녁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정신 차리고 보니, 또 10시 30분이 넘었다. 분명 퇴근했는데, 제2의 직장으로 출근한 기분이다. 드디어 진짜 퇴근이다.
오래전부터 직장업무 외에 정책 연구 보고서 작성 일을 서브로 하고 있다. 기존에 스터디카페에서 작업하던 걸, 집에서 하려고 한다. 방 하나를 다 뒤집어엎고 문서 타이핑을 위한 작업실로 만들었다.
그런데 퇴근하고 거실에서 주부로서 일하고, 작업방에 들어서면 밤 10시가 훌쩍 넘는다. 오늘도 문서 작업은 글렀다. 기존에 써놓은 거나 녹음기 켜두고 작게 소리 내서 읽고 퇴고작업 해야겠다.
오늘 직장에 시장이 방문하여 직원들에게 강의를 했다. 그 행사를 서포트하기 위해 하루 종일 뛰어다녔다.
얼마 전, 상사가 인터폰으로 "시장이 곧 방문할 예정이니, 대형 세미나실의 대청소가 필요하며, 무엇보다 곰팡이 냄새가 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라고 했다.
4년 전에 해당 대형 세미나실의 관리 담당을 1년 맡았었다. 내 이름이 붙은 실이었던지라 매일 환기시키고, 노후된 커튼 핀은 모두 교체하고 구석구석 청소까지 하곤 했다.
그리고는 1년 만에 다른 사람에게 업무가 옮겨졌다. 새로 바뀐 담당자는 그 세미나실의 곰팡이와 쓰레기에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냥 그러나 보다 했다. 딱 한 사람, 직속 상사만 더 이상 내 업무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듯하다.
3년 동안 직속 상사는 나에게 전화를 해서 "미리 세미나실 문 좀 열어두고 환기 좀 시켜야 돼요" 한다. 매번 "네"라고 대답했다. "더 이상 제 담당이 아닙니다."라는 얘기를 못했다. 대형 세미나실 앞에 다른 사람의 이름이 떡하니 붙어있는데, 아직 못 보셨나 보다.
도저히... 아무리... 몇 번을 생각해도... 제 담당이 아니라는 얘기가 나오지 않는다. '문 열어주는 건 간단한 일이니까'라고 생각하고 그냥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곰팡이 냄새가 나지 않도록 200석이 넘는 대형 세미나실을 이틀 안에 대청소하라고 한다. 당당한 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분명 몰라서 그럴 거다. 알고 그런다면... 아닐 거다.
순간 고민했다. "해당 실 관리 담당은 더 이상 제 담당이 아닙니다. 3년 전에 바뀌었습니다"라고 말할까 하다가... 빗자루와 쓰레받기 등 청소도구를 들쳐 엎고 세미나실로 향했다. 오래 고민하지 말고, 일단 청소를 끝내고 씩씩거려 보자는 마음이었다. 어차피 씩씩거려 봐야 내 마음만 아플 테니.
곰팡이 냄새제거를 위해 향기 나는 세탁세제로 대걸레를 빨아 구석구석 닦았다. 향기 나는 비누로 빤 걸레로 창가를 닦기도 했다. 다른 실에서 제습기 2대를 가져와서 이틀 동안 습기를 빨아들이도록 하고, 제습기에 물이 찰 때마다 교체하기를 반복했다. 쓰레기통 안이 너무 지저분하여 숨을 참고 바닥을 깨끗이 물로 닦았다. 햇볕 아래 뽀송하게 말려 제자리에 뒀다.
시키지는 않았지만, 질의자용 보조 마이크 설치, 만에 하나를 위해 마이크 새 배터리 교체, 플래카드 위치 정하고 정중앙에 부착, 청중의 위치를 가늠하여 강의대를 배치시키기도 했다. 죽일 놈의 ISTJ형이다. 그래도 오늘 강의도중 마이크에 문제가 생겨 바로 보조 마이크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한참 청소하고 있는데, 남편의 환청이 들렸다. "너는 다른 일에는 송곳으로 찔러도 피도 안 나올 것처럼 단호하면서, 왜 직장에서만큼은 우유부단하게 행동하는 거야. 나 같으면 바로 말하고 기분 나쁜 티 내. 그걸로 틀어질 사이라면 그 관계는 버리고 말아."라고 말하는 듯했다.
맞다. 피도 눈물도 안 나올 것처럼 원리원칙을 따지는 스타일이다. 그런데 "그건 내 일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귀찮기도 하고, 관계 틀어짐에 대해 약간의 부담감이 있기도 하다. 워낙 사이가 좋았던 부장이기 때문이다. 모르겠다. 나이가 들고 보니 그렇다.
예전 경행록에서 봤던 문구가 항상 머릿속에 남아있다. [한 가지 화를 참으면 백 가지 근심을 막아낸다.] 당장 내가 죽는 문제가 아니면, 손해 보고 말자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한 번의 화로 100가지의 새로 생기는 근심을 얻고 싶지 않다. 한 번의 말 못 함으로 100가지의 잡일을 얻었는지도?
정중하게 조심스럽게 웃으며 말하면 되지 않을까도 생각했다. 누군가 나에게 정중하게 웃으며 해당 내용을 말한다면 내 마음이 짜게 식을 것 같다. 본래 착하게 태어나지 않았기에 브런치에 문자로 풀어놓긴 해야겠다. 안 그러면 병 생긴다. 퉤 퉤 퉤.
이제 일하자. 근데... 눈이 감긴다.... 직장맘의 저녁시간은 매일 같은 모양으로 흐른다. 그래도 오늘 가장 잘한 일은 아들과 식사하며 반장선거 공약에 대해 대화 나눈 것과 딸의 영단어 시험 준비를 위해 잠깐 러닝 파트너가 돼 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소소하지만, 해보고 싶던 엄마놀이다. 그걸로 충분히 만족한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