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할아버지와 새벽에 만나기로 했다. 만남 장소는 텃밭! 매번 새벽에 일하러 가면 할아버지도 나와서 일하시기에 따로 약속할 이유는 없었다. 서로 말은 하지 않지만, 새벽에 함께 각자 일하는 사이다. 그러나 오늘은 "내일 새벽에 텃밭에서 만납시다"라고 약속한 날이다.
할아버지는 인터넷 구매 방법을 모르시기에 종묘사에서 씨앗을 구입하신다. 마침 봄동 씨앗을 사려던 참이셨다. 나도 인터넷으로 봄동 씨앗을 샀는데, 1 봉지에 1000개가 들어있다. 아마 10년 이상 농사를 해야 다 없어질 분량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발아율은 낮아지니, 할아버지께 나눠드리고 싶었다.
업무가 너무 많아 앞으로 오랫동안 텃밭에 들르지 못할 예정이다. 씨앗 나눔을 하기 위해 겸사겸사 출근 전 텃밭에 들렀다. 새벽에 텃밭에 도착하니, 할아버지의 애마인 농업용 오토바이가 서 있다. 역시 약속시간을 잊지 않으셨다.
종자의 이름을 네임펜으로 적어왔다. 씨앗들이 비슷하게 생겼기에, 헷갈리거나 물에 접촉되어 훼손되는 게 우려스러웠다. 오늘 내가 할아버지께 드린 씨앗은 봄동배추, 두메부추, 적상추, 종자용 검은 땅콩, 토종 가랏씨이다. 두메부추는 분명 1 봉지 시켰는데, 2 봉지를 보내왔다. 한봉은 그냥 가지란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드렸다.
할아버지는 새벽에 밭을 금방 만드시더니, 봄동과 가랏씨를 뿌리신다. 농사기술이 탁월하셔서 멋진 작물로 탄생시킬 것이다. 나는 초보라 발아에 실패할 확률이 높다. 할아버지의 농사기술로 탄생할 봄동과 가랏을 기대해본다.
그냥 출근하기 아쉬워, 텃밭 작물을 둘러보았다. 이내 '내가 이런 축복을 받아도 되나?'라는 마음이 스쳤다.
이제 열매를 맺어가는 가을 오이, 아직도 주렁주렁 열매를 내어주는 가지, 제발 꺼내달라고 아우성치는 고구마와 땅콩, 꽈리고추, 붉은 고추, 일반고추, 아삭이 고추, 제법 모양을 갖춰가는 시금치, 가을 깻잎과 당근 그리고 상추, 얼마 전 고라니가 다 뜯어먹어버린 치커리, 새순이 돋아나고 있는 치커리 위에 달팽이가 앉아있다. 아무래도 올해 치커리는 고라니와 달팽이가 다 먹을 듯하다. 추석용 쪽파, 점점 굵어져 가는 대파, 부추도 잘 자라고 있다.
직장 업무가 너무 많다. 연휴에도 최소한의 시간만 추석에 할애하고, 도서관에 머무를 가능성이 많다. 아마도 10일 정도는 텃밭에 들르지 못할 것이다. 무의 한랭사를 벗겨버렸는데, 10일 후에 텃밭에 도착했을 때에는 달팽이의 습격을 받아 앙상한 가지만 남을 확률이 있다. 어쩔 수 없다.
주변 아저씨들이 "농약을 뿌려줄까?"라고 자주 묻는다. 아직 무와 배추에 벌레 먹은 곳이 없는데, 미래가 걱정되시나 보다. 무농약으로 짓기로 결정했으니, 끝까지 100% 무농약 농사법을 고집해 본다. 아직까지는 성공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