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aling & 승진

by 자급자족

밤 9시에 밴드코어 운동수업이 있었다. 체육문화센터 로비에서 공부나 할까 하고 1시간 일찍 집을 나섰다. 책을 펴고 앉아있는데, 직장 동료로부터 전화가 왔다. 몇 번 얼굴을 스친 게 다인 동료였다.


한 상사가 보고서를 썼고 승진에 결정적인 큰상을 받았다고 한다. 동료는 우연히 그 보고서를 읽게 되었는데, 그동안 일한 본인의 성과가 빼곡히 들어가 있었고, 내 성과들도 었다며 열변을 토했다. 이 사실을 알고 있었냐고 한다. '알고 있었다.' 아니 안 봐도 보인다.


그 상사와 4년 동안 함께 일했고, 2년 전엔가 내 성과들로만 채운 그녀의 보고서를 목격했었다. 내가 기획하여 추진한 것들인데 모두 상사가 한 것처럼 꾸며져 있었다. 그 당시 다른 선배에게 부당함에 대해 상담했지만, 승진에 욕심 있는 사람의 패턴이 아니겠냐고 했다. 내입을 다물었다.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번아웃이 왔을 때 '내가 이 조직에서 한 노력들은 뭐지?'란 생각에 빠져나오기 힘들었다. 그 상사는 요즘 마지막 승진 관문을 앞두고 내가 아닌 다른 타깃의 성과를 steal 하고 있나 보다.


통화한 동료와 내가 다른 게 있다면, 그 동료는 불합리함과 윤리위배에 대해 당사자에게 1:1로 따졌다는 점이다. 나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감정을 숨긴 채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냈다. 동료는 steal 상사에게 크게 따졌지만, 상대방이 잘못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며 거품을 물었다. 입을 다문 나와 입을 연 동료의 결과가 같다.


왜 그걸 혼자 짊어졌냐는 동료의 물음에 "그렇게 승진하면 본인은 행복할까? 싶었어요."라고 답했다. 그렇게 승진하면 정말 행복할까. 승진해 봐야 하루 지난 내일일 뿐. 그렇게 승진한 본인이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겨진다면 손뼉 쳐줘야 할 인생이다.


그동안 그렇게 남의 성과와 지식을 훔치는 사람들에게 왜 '표현도 못할' 화가 을까. 쓸모를 계획하지 못한 성과라도 거기에 쏟은 열정과 진심이 무시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가져다 써도 되겠느냐' 혹은 '고맙다' 정도의 표현은 있어야 상도덕에 맞지 않나 싶다.


휴직 8일 차에 접어든 나는 요즘 미칠 것 같았다. 이건 관뚜껑 안에 들어있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오늘 전화를 준 동료의 하소연을 듣다 보니, 몸담고 있는 조직에서 1년을 벗어나 생활할 수 있다는 건 괜찮은 기회인 것 같다. 새삼 쉼의 가치를 알게 해 준 동료에게 감사하다.


전화준 동료는 괴롭겠지만 내 괴로움을 한 명이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다. 하마터면 하소연도 못해보고 무덤까지 가지고 갈뻔했다.


통화를 마치며 마지막으로 꺼낸 동료의 말은 "승진에 관심 없었지만, steal 당하고 싶지 않아 저도 제 성과들을 승진하는데 쓸까 봐요."였다. Steal 상사는 승진에 관심 없던 후배도 승진으로 이끄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