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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대표 Oct 29. 2019

아내의 배를 보고 깍듯이 인사한 어느 종업원



얼마 전 아내와 속옷을 사러 갔다. 임신 7개월에 접어든 아내는 겉으로 보기엔 임신했는지도 모를 정도였지만, 배가 점점 불러오면서 수유할 수 있는 속옷이 필요하다고 했다. 주말을 맞이해서 아내의 손을 잡고 백화점으로 향했다.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한 매장에 들어갔는데, 중년 여성으로 보이는 여직원분이 아내의 배를 보고 무척 친절한 미소를 띠며 인사를 했다.  


"어서 오세요, 어떤 제품을 찾으세요?" 


1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이것도 입어보고, 저것도 입어보고 하다가 겨우 한 벌을 골랐다. 그럼에도 여직원분은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일일이 제품을 보여주셨고, 계산할 때 "손님, 방문하신 김에 카드도 하나 만드세요. 연회비가 없거든요. " 하고 이야기하며 쏠쏠한 '실적'도 올렸다. 

왜 모르겠는가? 위탁이든 개인이든, 사업자에게 친절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큰 무기다. 웃는 얼굴에 침을 못 뱉는다는 말처럼, 웃는 얼굴은 누구에게나 가치있는 의미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나이가 지긋한 그 여종업원도 세상 물정이라고는 멸치 대가리만큼도 모르는 우리 부부를 통해 꽤 쏠쏠한 실적을 올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날은 달랐다. 아내의 볼록한 배를 보며 깍듯하게 예의를 지키던 그 분의 태도에서 나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언젠가 마음이 무척 힘든 때가 있었다. 넓은 홀에서 공연을 준비하던 때였는데, 연이은 연습과 일정으로 무척 피곤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모든 것이 짜증스럽게만 느껴졌다. 그 때, 머리가 하얗게 센 어느 노인이 걸어들어오는 것을 보고 생각지도 못한 마음이 나도 모르게 불쑥 들었다.  


"지혜를 가진 분이 들어오신다."


생각지도 못한 마음이었다. 무척 피곤했고, 짜증은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있었다.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지금도 잘 모른다. 하지만 이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내가 겪은 어려움과 문제들을 이미 겪었을, 삶의 지혜를 가진 사람에 대한 존경심. 그 존경심이 나도 모르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것 같았다. 그 때의 경험이 생각나면서, 나는 어렴풋이 그 여직원분이 왜 따뜻한 마음으로 우리를 대했는지 알 것 같았다.  


"생명을 잉태한 젊은 부부가 온다." 


직원이 손님을 대하는 차려진 격식이 아닌, 생명을 잉태하는 기쁨을 아는 젊은 부모에 대한 예의.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남은 삶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젊은 부부. 그런 젊은 부모에게서 깊이를 알 수 없는 풍요로움을 느꼈던 게 아니었을까.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생명을 잉태한 부모는 누구에게나 친절한 미소를 받을 수 있는 품격을 가진 존재다.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서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아프리카의 속담처럼.  

나도 그렇다. 길을 가다가 젊은 부부가 아기를 안고 가는 걸 보면 "젊은 부부구나."했다. 첫째 아이를 가지기 전까지는. 지금은 마음이 조금 달라졌다. 일면식도 없는 젊은 부부, 혹은 젊은 남성이 아기를 안고 가는 걸 보면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진다. 아기를 가진 순간부터 타인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존재로 성장하는 사람에 대한 감탄, 희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마음 깊이 깨달을 수 있는 삶의 지혜를 가진 존재를 눈 앞에서 보는 것에 대한 알 수 없는 경외심. 부모로서 가질 수 있는 당연한 마음, 그런 것에서 어떤 동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 경외감으로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진다.   


"저 아기는 저 사람에게서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사랑을 받고 자라겠구나." 


젊은 아버지, 젊은 어머니. 저들도 누군가에게 아들이었고 딸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그 사랑을 그들의 딸과 아들에게 부어주고 있는 것이다. 뜨거운 그 사랑과 겸비한 마음을 담아서. 나는 그런 마음에서 따뜻한 감동을 만나고, 사랑의 온도를 느낀다. 

모든 부모가 옳진 않다. 잘못된 생각을 갖고 사는 사람들도 많다. 그럼에도 희생의 마음을 가진 존재라는 점에서 부모가 존경받아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나는 그 직원의 인사에서, 아내가 존경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조금씩 불러오는 아내의 배에는 심장이 뛰고 있는 생명체가 자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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