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늘 그렇듯 축축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거실엔 싸늘한 기운이 맴돌았다. 분명 설거지를 하고 잠든 것 같은데, 설거지통에는 김칫국물이 묻은 밥그릇과 젓가락이 소주잔과 함께 담겨 있었다. 창문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소리가 민재의 귓가에 들려왔다. 찬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소연이 자나?”
수건을 목에 건 아버지가 발걸레로 발을 닦으며 민재에게 물었다. 오늘도 아버지의 눈은 부어있었다.
“깨울게요.”
“됐다. 일어나겠지.”
“언제 오셨어요?”
“일찍 왔는데 자고 있데. 밥은 먹고 잤나?”
“예.”
“뭐뭇노?”
“멸치랑 계란이요.”
“그래. 토요일에 햄버거 먹으러 가자.”
어둡던 민재의 얼굴에 환한 기색이 맴돌았다.
아버지는 늘 바빴다. 아침에 나가면 소연이랑 민재가 잘 때 집으로 들어왔다. 아, 물론 확실한 건 아니다. 민재의 기억이 꿈결처럼 사그라들 때쯤이면, 꺼끌꺼끌한 아버지의 수염이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민재는 느낄 수 있다. 아버지랑 함께 갔던 목욕탕에서 맡아본 적 있는 화장품 냄새, 그리고 흐느끼는 듯한 아버지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민재는 꿈나라로 향했다.
민재는 엄마가 없다. 민재가 7살, 소연이가 5살 때 사라졌다. 언젠가 돌아가신 할머니가 이웃집 아주머님들이랑 이야기하면서 “저거 나라로 도망가뿟다.”라고 이야기하신 게 기억났다. 엄마의 나라가 어디인지, 민재는 모른다. 베트남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확실하진 않다. 아무도 엄마의 행방을 몰랐다.
엄마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기억이 난다. 어느 늦은 밤, 민재와 소연의 손을 잡고 엄마는 집 근처 대형 마트로 갔다. 소연이에게는 곰인형을, 민재에게는 제일 싼 레고시리즈를 사주었다. 오는 길에 슈퍼마켓에서 엑설런트 아이스크림을 샀다. 하나만 먹기가 아쉬워서 세개나 먹었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소연이와 민재를 품에 안고 잠자코 사랑한다고 이야기했다. 엄마의 목소리가 참 따뜻하다, 느끼며 꿈나라로 향했다. 그리고 일어났을 때, 엄마가 없었다.
“저거 시아바이 똥오줌 치우는 것도 쉬운 일 아이지. 내사 민재아바이도 글코 안타깝다만, 머 우야겠노? 지 인생도 있는기지. 시아바이 때문에 가가 고생 많았다.”
집에는 가족사진이 한 장 있었다. 엄마, 아빠, 민재, 소연이, 이렇게 네 명이다. 사진 속 엄마는 항상 굳어있는 표정이다. 엄마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민재의 마음도 함께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싸락눈이 섞인 2월의 바람은 민재의 마음을 더욱 더 차갑게 만들었다.
“밥 챙겨먹고, 소연이 공부도 좀 봐주레이. 뭔 일 있으면 전화하고.”
“언제 오세요?”
“일찍 오께. 먼저 자고 있어라.”
그리곤 지갑에서 만원짜리를 한 장 꺼내 민재 손에 쥐어주었다. 아빠의 옷에서는 민재가 모르는 묘한 냄새가 났다. 술과 먼지가 뒤섞인 냄새라는 것을, 민재도 어른이 되고 나면 이해할 수 있을까.
“민재야! 학교가자!”
올해도 같은 반이 된 수진이였다. 수진이는 반짝거리는 꽃무늬 장식이 달려있는 분홍색 구두를 신고 왔다. 걸을 때마다 또각또각 소리가 나는 그 구두는 수진이가 가장 아끼는 신발이었다. 민재는 수진이를 볼 때마다 그 구두가 수진이에게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잠시만. 소연이 준비가 덜됐어.”
“응, 알겠어. 기다리고 있을게!”
수진이는 민재편이다. 2학년 2학기가 시작될 무렵 수진이의 분홍색 구두를 쓰레기통에 숨겨두었던 상진이 녀석은, 민재의 주먹질에 쌍코피가 터진 뒤로 다시는 수진이에게 말도 걸지 않았다. 덕분에 민재는 학교에 찾아온 상진이 엄마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았지만, 그 뒤로 수진이는 민재의 둘도 없는 단짝친구가 되었다. 민재는 그런 수진이가 좋았다. 오늘은 수진이한테 쫀드기 사줘야지, 민재는 마음먹었다.
“나 만원 있다! 이따가 내가 쫀드기 사줄게.”
“만원? 너 돈 그렇게 많아?”
“응. 아빠가 아침에 주셨어.”
“와 좋겠다! 근데 민재 너, 아빠가 너 맛있는 거 사먹으라고 돈도 주고 그러시는데 아빠한테 잘해야 돼. 알겠지?”
“나 엄청 잘해. 소연이 밥도 내가 다 먹여.”
“그래, 민재야.”
큰 눈에 새하얀 피부를 가진 수진이는 공주님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예뻤다. 수진이의 머리를 묶고 있는 방울을 보면서 민재는 수진이가 우리 엄마였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했다. 수진이가 민재의 손을 꼭 잡고 학교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