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선생님

2장. 새학기(초고)

선생님

by 전대표

새학기가 시작된다는 즐거움도 잠시, 민재의 마음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집에서 급하게 나오느라 대왕딱지를 안 가져왔기 때문이다. 혹시나 가방에 있는지 조회시간 직전까지 뒤져봤지만 없었다. 손에 쥐고 잠든 기억까지는 나는데 챙긴 기억은 없다. 아무래도 이불속 어딘가에 두고 나온 것 같다.

“김민재 빨리 나와! 너 뭐해!”

“어, 지금 갈게!”

운동장으로 뛰어나가면서도 민재의 머릿속은 딱지 생각밖에 없었다.


오늘은 찬욱이 녀석과 약속한 딱지 쟁탈전이 있는 날이다. 몇일 전 아빠가 사오신 대왕딱지는 민재의 가장 큰 자랑거리였다. 제 아무리 멋진 딱지라도 민재의 대왕 딱지 한방이면 모조리 뒤집어져서 배를 발라당 까고 누웠다. 대왕 딱지는 민재가 아이들에게 큰소리칠 수 있는 유일한 자랑거리였다. 전교생 중에 대왕딱지를 가진 아이는 나밖에 없을걸, 민재는 생각했다.

“나 대왕딱지 있어! 다 덤벼!”

“우와! 대왕딱지다! 민재 대왕딱지 갖고 있어!”

“뭔데? 아버지가 사주셨나?”

“어, 어제 아빠가 사오셨어.”

“와, 민재는 좋겠다. 아빠가 대왕딱지도 사주고.”

“부럽다. 나도 아빠가 대왕딱지 사줬으면 좋겠다.”

대왕딱지는 아이들이 받는 용돈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꼬박 보름 정도는 용돈을 모아야 겨우 살 수 있는 고급 딱지였다. 그래서 대왕딱지를 가진 친구들은 또래들 중에서 아무도 없었다. 문구점에 들를 때마다 민재와 아이들은 자신들의 손바닥크기보다 더 큰 대왕딱지를 만지작거리다가 아이들을 잡으러 문방구까지 쫓아온 선생님에게 붙들려서 교실로 들어가곤 했다. 그만큼 인기 있는 딱지였다. 저 딱지만 있으면 다른 모든 딱지들을 다 딸 수 있을텐데, 아쉬움이 남았다.

그 대왕딱지를 아빠가 사오신 거였다.

민재를 앉혀놓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시던 아버지께서 쓰러지듯 누우셨을 때, 귓가에 대고 "아빠, 저 대왕딱지 갖고 싶어요."하고 이야기한 게 벌써 일주일 전이었다. 큰 기대를 하고 이야기한 건 아니었다. 야단이나 맞지 않으면 좋겠다, 생각하면서 던진 말이었다. 민재의 예상과는 달리 아버지는 들릴듯 말듯한 목소리로 대답하셨다.

"다음주에 사줄게."


수진이가 보는 앞에서 찬욱이 녀석을 멋지게 골려줄 생각을 하면서 대왕딱지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었다. 그런데 하필 오늘 그 대왕딱지를 안갖고 온 것이다. 지루한 하루를 보낼 생각을 하니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아, 재미없어."

가만히 서서 눈만 굴리던 민재가 한마디 툭 내뱉았다.

"쉿! 민재야, 들리겠어."

수진이는 민재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다그쳤다. 주변녀석들도 멍하니 서서 앞만 바라보고 있다기 민재가 던진 한마디에 킥킥 웃어댔다.

아침 조회시간마다 전해지는 대머리 교장선생님의 훈화는 지루하기 짝이 없다. 왜 선생님이라는 사람들은 어른인데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감정은 하나도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아빠의 말씀에 의하면 ‘어른들 하는 말 중에 틀린 말은 하나도 없다’지만, 어디까지나 듣기 좋은 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민재와 아이들은 알고 있었다. 민재는 연신 발가락 끝으로 발 아래의 모래를 건들면서 발가락에 닿는 모래의 숫자를 세고 있었다.


세상엔 얼마나 많은 대왕딱지가 있을까?

대왕딱지가 더 많을까 모래알이 더 많을까?

세상엔 얼마나 많은 모래알이 있을까?

모래알이 더 많을까, 사람이 더 많을까?

그 사람들은 모두 엄마가 있을까?

엄마만 있는 사람이 더 많을까, 아빠만 있는 사람이 더 많을까?

그 사람들도 우리 아빠처럼 술을 마시고 들어올까?

그 사람들도 우리 아빠처럼 술을 마시고 눈물을 흘릴까?

그 사람들은


“똑바로 서라.”


고개를 숙이고 모래알을 세던 민재는 옆을 쳐다봤다. 김효숙 선생님이었다.


“앞에 봐. 뭔 생각하고 있어 지금?”


참새가 짹짹.


"정신 차리고 똑바로 서."

"네."


참새가 짹짹.

김효숙 선생님의 별명은 참새였다. 뚱뚱한 참새처럼 생겼다고 해서 만들어진 별명이었다. 작은 눈이 더 작아보이는 안경을 쓰고 다니는 이 선생님은 아이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옆 반 담임이었다. 혹시라도 복도에서 마주칠세라 아이들은 김효숙 선생님을 마주치면 도망다니기 바빴다.

쳇.

이번엔 차마 입밖으로 꺼낼 수 없어서 속으로만 생각했다. 차라리 먹을 걸 주면 이렇게 지루하진 않을 것을. 저렇게 길게만 이야기하지 않았어도. 길을 가다가 마주치는 사람 아무나 붙들고 듣는 이야기도 교장선생님의 훈화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문득 '우리 아빠도 저런 이야기 자주 하는데...'하는 생각이 민재의 마음을 파고 들었다.


민재가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일이다. 깊은 어둠이 내릴 때면, 아빠는 자는 민재를 흔들어 깨웠다. 그리고 눈을 비비는 민재를 앉혀두고 오래오래 이야기를 하셨다. 그런 날엔 아빠에게서 짙은 술냄새가 났다. 아빠도 교장선생님처럼 재미없고 지루한 훈화를 했다. 하지만 아빠의 이야기가 싫지 않았다. 교장선생님의 훈화말씀과 비슷했지만, 다른 이야기였다.

"남자는 말이야. 항상 번듯하게 양복 입고, 넥타이 메고, 구두도 신고, 그렇게 출근해야 돼. 그래야 사람들이 안무시해. 민재도 열심히 공부 안하면 나중에 아빠처럼 가난하게 살게 된다."

"아빠처럼 가난한 게 뭐에요?"

아빠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 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돈이 없는 걸 가난하다고 하는거야."

"돈? 아빠 돈 없어?"

"그래, 아들. 아빠가 돈이 없다. 그래서 엄마도 멀리 멀리 갔고."

"근데 나는 아빠 있는데."

아빠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는 것을, 어린 민재도 느낄 수 있었다. 아빠는 자상한 목소리로 다시 설명해주었다.

"가난하다는 건 말이야. 세상이 내게 어떤 기회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시간을 헛되이 낭비한 사람이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세상이 기회를 주지 않은 게 아니라 내가 기회를 잡을 만한 능력과 볼만한 눈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을 이야기하는 거야."

"음, 근데 나는 아빠 좋은데."

"왜? 민재는 아빠가 왜 좋아?"

"아빠한테서 나는 냄새가 좋아서."

"냄새? 아빠한테 무슨 냄새나?"

"응. 흙냄새."

아빠는 민재를 꼭 안아주었다. 민재는 아빠의 품이 무척이나 따뜻하다고 느꼈다. 민재를 안은 아빠의 품이 작게 떨리는 듯 했다.


"가난하다는 건 말이야. 세상이 내게 어떤 기회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시간을 헛되이 낭비한 사람이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세상이 기회를 주지 않은 게 아니라 내가 기회를 잡을 만한 능력과 볼만한 눈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을 이야기하는 거야."


민재의 머릿속에는 아빠가 습관처럼 말씀하시던 이야기가 계속해서 맴돌았다. 대머리 교장선생님의 훈화는 자그마치 30분이나 계속되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1장. 어두운 하루(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