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징그럽다는 게 뭐야?”
“몰라.”
“엄마, 미끄럽다는 게 뭐야?”
“몰라.”
“엄마, 그럼 간지럽다는 게 뭐야?”
“몰라.”
엄마는 모른다는 말 밖에 몰랐다.
몰라, 몰라, 몰라.
왜 엄마는 이런 것도 가르쳐주지 못할까? 아빠는 잘 알려주던데. 문득 엄마가 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는 그렇지 않았다.
“아빠, 징그럽다는 게 뭐에요?”
“무섭진 않은데 못 만지는 거 있지? 그걸 징그럽다고 하는 거야.”
“미끄럽다는 건 뭐에요?”
“징그러운 건 대부분 미끄러워.”
“그럼 간지러운 건 뭐에요?”
“그 미끄러운 게 옷 속에 있다고 생각해봐. 그게 간지러운 거야.”
아빠의 말은 쉬웠다. 그리고 편안했다. 단 한번도 모른다고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모르는 게 있어도 모른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엄마가 떠나고 난 뒤, 아빠는 지혜로워졌다.
“모르면 물어보거나 찾아보면 돼. 어려운 거 아니야.”
민재는 아빠가 무척 지혜롭다고 생각했다.
민재의 기억 속에는 두 단어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내 간다."
"아들 자나?"
민재는 엄마 아빠가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이른 아침 출근하실 때 한 번, 잠결에 한 번, 두 번 들려오는 아빠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없었다. 민재는 아빠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메마른 가지와 같다고 생각했다. 따뜻함이 묻어나지 않았다.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한남들은 다 똑같대."
"한남이 뭔데?"
"한국남자들이래."
찬혁이가 한 말이 문득 생각났다.
"옆집 아줌마랑 이야기하는 거 들었거든. 여자들이 밥해주고 빨래해주고 애 낳아주고 해도 한남들은 아무것도 안한대. 그래서 '엄마, 그럼 나랑 아빠도 한남이야?'하고 물었는데 나한테 그런 말 쓰지 말래."
아빠는 집에 오면 잠만 잤다. 아무일도 하지 않았다. 일요일에는 휴대폰만 봤다. 엄마는 그런 아빠에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메마른 얼굴로 조용히 빨래만 갰다. 엄마와 대화를 하지 않는 것, 술을 마시고 들어오셨을 때 엄마를 때리는 것. 그것만 빼고는 아빠가 좋았다.
엄마의 얼굴에는 자주 멍이 들었다. 눈두덩이가 시퍼렇게 부어오른 모습을 본 적도 있다. 민재와 소연이에게는 한없이 자상한 아빠였기에, 민재는 엄마를 때리는 아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빠가 엄마를 때리는 것을 처음 본 적이 있다. 잠결에 들려오는 큰 소리에 민재는 잠이 깼다. 방문이 닫혀 있었지만 아빠의 소리치는 소리는 뚜렷하게 들렸다. 방문을 살짝 연 순간, 민재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장면을 목격했다. 아빠가 엄마의 따귀를 때리는 장면을 목격한 것이었다. 아빠의 손이 엄마의 뺨으로 날아가고 짝, 하는 소리가 들렸을 때, 민재는 문을 닫았다. 이후 장면은 보지 못했다. 울고 있는 소연이를 끌어안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숨을 고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빠의 입에서는 험한 욕이 튀어나왔다.
"돈이나 빼돌리는 년! 니네 나라 사람들 만나서 하는 짓거리가 고작 노름질이냐? 다시 너네 나라로 돌아가 이년아! "
엄마에게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때리는 소리만 들렸다. 아빠가 엄마를 때릴 때, 엄마는 맞고만 있는 것 같았다. 엄마는 참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제는 적응이 된 것일까? 왜 엄마는 아무말도 없이 맞고만 있을까? 엄마는 울지 않았다. 어쩌면 울음을 참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의 얼굴을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할머니가 아빠를 말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마 때려라 이놈아! 니 또 술먹고 왔나? 세상 천지에 니 혼자 사나!"
"어무이는 좀 놔보소! 내가 이 여자 때문에 미쳐버리겠단 말요!"
"야가 돈을 우에따꼬 그카노? 좀 차분하게 이야기를 해야 알 거 아인가베."
아빠도 할머니 앞에서는 어린 아이와 같았다. 할머니가 말리면, 그제서야 아빠도 못이긴 듯 주춤하는 모습을 민재는 느꼈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아빠의 눈가는 벌겋게 달아오르곤 했다. 눈물 같았다.
“오늘 낮에는 그 사람들이 회사까지 찾아와왔어요. 이자 갚기도 빠듯한데 원금 상환은 꿈도 못 꾼다 아입니까? 아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크는데, 돈 들어갈 데도 많은데, 그 돈을 언제 다 갚아요?”
“…….”
“날보로 뭐라는지 압니까? 당장 이달 말까지 안 갚으면 애들이 어떻게 될 지 두고 보잡니다. 애들한테 학교 마치고 집에 올 때 길목에 서성거리는 아저씨들 조심하라고 이야기해랍니다.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란 말이요!”
할머니에게서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땅이 꺼질 듯 내쉬는 할머니의 한숨소리만이 민재의 귓가에 들려왔다. 어두컴컴한 방안은 소연이의 숨소리와 할머니의 한숨소리로 가득 찼다. 민재는 그 짙은 향기가 너무 탁해서 숨을 쉴 수 없었다. 창문을 열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싶었지만 소리가 날까봐 꾹 참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는 척을 해야만 했다. 조용하던 거실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작은 속삭임으로 시작해서 점점 커지더니, 이윽고 거대한 울림이 되어 민재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아버지는 울고 있었다.
“어무이, 이제 우리는 길바닥에 다 나앉게 생겼소. 내 인생이 이레 될 줄 누가 알았단 말요!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이런 일이 생긴단 말요!”
“괜찮다 아범아, 괜찮다. 살다 보면 있다가도 없는 게 돈 아인가베. 그거 몇 푼 된다꼬 그카노? 그 돈 좀 날렸다고 저 멀리서 델꼬 온 아를 이레 때려가 되겠나? 살다 보면 좋은 날도 올끼다.”
엄마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엄마도 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그 생각이 오래 이어지지는 못했다. 할머니의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민재도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할머니 앞에서는 아빠도 어린 아이가 되었으니까, 아빠보다는 할머니의 말이 더 힘이 있다고 느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울고 있는 소연이를 다독거리며 민재는 졸음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다시 깊은 꿈의 터널로 여행을 떠났다. 귓가에서 아빠와 할머니의 이야기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