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의 외로움, 인내의 시간

by 전대표

제법 생각이라는 것을 할 만한 시기부터 일기를 써왔다. 수십 권의 일기장을 소장하는 식의 예찬론자는 아니고 시간이 날 때 틈틈이 기록하는 수준이다. 어느 날에는 한 줄을 쓰기도 하고, 어느 날에는 3장 이상 쓰기도 한다. 그리고 그 일기는 매우 솔직하고, 거짓이 없는 나의 내면세계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해주곤 한다.

아래는 2021년 7월 24일 토요일 일기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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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들에 집중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건강(Health)이 그중 하나다. 건강의 종류는 다양한데 크게 5H로 나뉜다. 가족의 건강, 경제적 건강, 육체적 건강, 정신적 건강, 영적 건강. 재미있는 사실은 경제적 건강, 육체적 건강, 정신적 건강이 완성되면 가족의 건강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육체를 잘 가꾸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강한 정신력을 갖게 되고(정신력이 강한 사람이 육체를 잘 가꾸기도 한다.), 정신력이 건강한 사람이 사회생활도 잘하고, 사회생활을 잘하면 경제생활도 좋아지고, 그러면 당연히 가족과의 소통도 원활할 수밖에 없다.

가족의 건강(불화, 부모님의 건강 악화, 자녀의 잦은 병치레 등)이 좋지 않아서 나머지 3개가 틀어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불화를 제외한 가정의 건강 문제가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의 노력 부족으로 말미암았을 가능성은 지극히 적다. 암, 뇌종양, 백혈병과 같은 불치병은 가족력이거나 평소의 식습관과 규칙적이지 않은 생활패턴으로 말미암았을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가정의 건강을 위해서 내가 반드시 지키고자 노력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아내와 대화를 많이 나누려고 노력하는 것, 아이 스스로가 이해하지 못하는 실수와 잘못에 대해 즉흥적으로 질책하지 않는 것이다. 가장이 건강하지 않으면, 가정은 무너지기 쉽다. 특히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건강하지 않다면 더더욱 그렇다. 살아보니 경제적인 부분은(가정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래 전 조상들처럼 하루 3끼 굶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하루 3끼 모두 하얀 쌀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경제적인 부분에서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든 살 길이 생기기 마련이다. 반면에 부모의 정신건강과 육체 건강이 평균치보다 낮다면 많은 어려움이 생긴다. 내가 독서하고, 글을 쓰며 세상의 유혹에 쉽게 끌리지 않는 것도 오직 가족의 건강 때문이다. '나는 오늘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 하는 생각을 오랫동안 갖고 살아왔기 때문에 무리한 운동은 하지 않으며 적절한 선에서 운동을 마친다. 이렇다 할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는 성격 덕분에 불면증은 물론, 우울증도 없다. 잠을 좀 줄였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잘 자는데, 머리만 대면 잠드는 습관이 어릴 때부터 있었기에 불면증 따위는 걱정하지 않는다.


매일 글을 기록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로는 생각을 정리하는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다. 무엇이든지 변화 없이 두면 상하고, 스러지고, 낡으며, 변해가기 마련이다. 글을 쓰는 기술도 마찬가지다. 생각을 글로 표현해낼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고차원적인 정신적 기술이다. 나는 생각을 글로 정리하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생각을 글로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은, 극한의 어려움을 만났을 때 그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헤쳐나가기 어려운 문제들을 만났을 때, 글로 풀어내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의 상당 부분이 정리되는 경험들을, 나는 갖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역사로서의 기록이다. 역사는 기본적으로 교훈을 담고 있다. 내가 쓰는 글을 나 외에 누가 읽겠는가 싶고 역사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기에도 다소 거북스러운 감이 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되돌아보면 오늘 가지고 있었던 생각의 깊이나 마음의 흐름을 훑어보면서 나의 현 위치를 반성할 수 있고, 또 지금 가지고 있는 감사와 소망이 훗날에 찾아올지 모를 두려움과 어려움을 지탱할 수 있는 마음의 나침반이 되어줄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있어서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이 가족의 건강을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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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단체 국장으로 재직할 때였다. 전 세계 90개국에서 동시에 진행하는 글로벌 캠프를 준비하느라 2달간 진땀을 뺐다. 행사 마지막 날 저녁, 아내가 교통사고가 났다. 가벼운 접촉사고였지만 아내는 밤새 고열에 시달렸다. 일기는 사고 다음날 기록한 내용이다.

일기에 불과하므로 '문맥상 오류를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글'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당시 느꼈던 울적함, 두려움, 걱정, 범퍼가 부서진 것 외에 별다른 외상이나 지장이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안도감이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당시 느꼈던 내면의 감정을 기록한 일기, 일상의 기록물에 불과한 일기가 사실은 '나'라는 이름의 가장 좋은 독자를 위한 글인 셈이다. 결국 나를 위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글쓰기는 살면서 반드시 배워야 하는 일종의 처세술인 것이다.


글이라는 것이 오직 독자를 위한 인내의 시간임을 의미한다면, 일기는 좋은 글과 거리가 멀어진다. 하지만 일기는 혼자 쓰는 글이다. 누가 대신 써줄 수도 없고, 베낄 수도 없다. 가장 진실된 내면의 흐름을 기록한 글이기에, 가장 진실된 글일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글이 일기와 같을 필요는 없으나, 일기를 쓰듯 글을 써야 그 울림을 더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일기는 오직 진실만을 담고 있기에 아주 경박하지도, 그렇다고 마냥 수더분하지도 않다. 글이 진실되어야 하는 이유다.


글을 쓰는 것은 외로움에 익숙해져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글을 쓰는 것은 다른 활동과 달리 필연적으로 사색의 시간이 필요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독서도 글쓰기와 같이 사색의 시간이 필요한 활동이지만, 활자화된 대상과의 대화라는 점에서 글쓰기와 상충되는 부분이 있다. 그렇기에 심리적인 안정을 위하여 카페나 도서관 같은 공간에서 글을 쓸 수는 있어도 주변 사람들과 내면의 시간을 공유할 수는 없다. 어느 지인은 새벽 2시 반에서 4시 사이에 서재에서 글을 쓰는데, 그 시간에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기 때문에 수월하게 글을 쓴다고 한다. 내가 주로 글을 쓰는 곳도 서재이지만, 꼭 서재에서 글을 써야만 하는 이유도 없고 서재에서만 쓸 수도 없다. 소설을 쓰는 장소는 주로 아들이 다니는 어린이집 앞에 위치한 편의점 테이블이었는데, 수필이나 에세이와 달리 생동감 있는 글의 구성을 짜기 위해 현실이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습관화하는 게 좋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십수 년 전 나로 하여금 배우의 삶을 살게 해 준 연출가 선생님은 비가 오는 날을 좋아했는데, 요절한 그분을 위해 비가 오는 날에만 <배우론> 원고를 쓰곤 했다. 그런 날에는 편의점이든, 카페든, 서재든 상관없었다.


소설은 원고지에 쓴다. 지독한 악필이기 때문이다. 자기 계발서나 수필은 괴발개발 휘갈겨 써도 문맥의 흐름만 놓치지 않으면 별다른 문제가 없다. 소설은 다르다. 단어 하나에 글이 달라진다. 소설 <레미제라블>에는 19년간 징역살이를 하는 동안 피폐한 영혼을 얻게 된 장발장이 극적으로 변화하는 장면을 아주 세밀한 필체로 기록하고 있다. 장발장이 마리아 주교의 성당에서 나와 상념에 사로잡혀 프티 제르베의 동전을 빼앗은 이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데, 이때의 사건 이후로 장발장의 인생은 급격한 속도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당시 극 중에서 장발장이 큰 소리로 외친 말은 "I'm a wretch!(나는 얼마나 불쌍한 인간인가!)"였다. w만 빠져도 글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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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게 지독한 외로움과의 싸움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믿을만한 사람이다. 일례로 『토지』를 집필한 박경리 선생을 들 수 있다. 박경리 선생의 글은 화려하지 않다. 담백하다. 그런데 여운이 있다. 역사가 담겨 있다. 원인이 무엇일까, 궁리하다가 선생님의 일대기를 검색해봤다. 이런 내용이 나왔다.


그는 한국전쟁 통에 남편을 여의었고 뒤이어 아들도 잃었다. 유일하게 남은 혈육인 딸(62)은 남편 옥바라지로 호된 고역을 치렀다. 딸의 남편, 즉 선생의 사위는 김지하(67) 시인이다. 생전의 그는 “나에게 이런 시련이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20년 넘게 『토지』에 매달릴 수 있었겠어”라고 되물었다.

2008. 5. 5일 자 중앙일보 박경리 선생 추모기사의 일부


그의 글이 아름답고 담백할 수 있었던 이유는 6․25라는 역사를 경험한 인물이었기에 가능했던 것도 아니었고, 작가로서의 역량을 갖추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도 아니다. 인고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고의 시간이 그로 하여금 작가로서의 역량을 갖출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고, 인고의 시간이 역사에 남을 작품을 선사해준 것이다.


인내는 영혼의 닻이며, 따뜻한 품위를 갖춘 사람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훌륭한 인격이다. 훌륭한 품격인 인내를 갖추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고통과 싸우고, 슬픔과 조우하며, 까다롭기 그지없는 사람들과의 부대낌 속에서 오랜 시간을 신음해가며 하루하루를 보내는가? 그런 인내 속에서 만들어지는 글은 차원이 다른 깊은 맛을 풍긴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크고 작은 어려움을 만날 때가 있다. 사실 어려움 그 자체는 무척 훌륭한 벗이며, 좋은 스승이 된다. 어려움을 통해 인간은 성장하기 마련이다. 그 어려움을 어떤 기회로 바라볼 것인가가 문제다. 때때로 찾아오는 막연한 인고의 시간 속에서, 조용한 시간을 갖고 나를 되돌아보는 삶의 과정을 가진다면 풍요로운 글의 힘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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