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성과 보사노바의 공존
보사노바가 하나의 장르로 정착된 일본이나 필리핀에 비해 한국 가요계에서 보사노바의 존재는 약한 편이지만, 그럼에도 이지리스닝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한국의 대중가요 역사에 이름을 남긴 보사노바 곡들을 시대별로 몇 개 꼽아보았습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 기준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 가요적 정서를 잘 표현했을 것.
브라질 음악의 리듬감, 편곡을 잘 살렸을 것.
대중적으로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었을 것.
아파트 담벼락보다는
바달 볼 수 있는 창문이 좋아요
나온 지 30년이 넘도록 제주도를 대표하는 곡입니다. 보사노바가 주는 특유의 살랑거림과 제주도 하면 떠오르는 열대의 풍경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면서, Chega de Saudade처럼 브라질 음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조와 단조의 대비까지 재현한 한국형 보사노바라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동물원 1집에 실렸던 곡이지만 김광석의 연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동물원 앨범 버전으로 들으면 보사 느낌이 나지 않는데, 김광석의 솔로 연주를 들어보면 확실히 보사 리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사와 멜로디 모두 말이 필요 없는 명곡입니다.
춘천 가는 기차는 나를 데리고 가네
오월의 내 사랑이 숨 쉬는 곳
이 노래 역시 30년 넘게 춘천이라는 지역을 대표하는 명곡이 되었으며 한국의 많은 청년들이 춘천과 강촌, 남이섬에 대해 갖고 있는 로맨틱한 감정을 그려냈습니다. 브라질에서도 기차와 관련된 노래가 많은데 쌈바 리듬이 기차가 칙칙폭폭 달려가는 것과 비슷하게 들려서 그런가 봅니다.
선전문안이 들끓는 밤 열 한 시
나지막이 샴푸의 요정이 속삭이지 않는가
그녀의 노래가 귓전에 맴돌지 않는가
쓰세요, 쓰세요, 사랑의 향기를
처음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에게 "한국에도 이런 노래가 있나?" 하는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노래로 원래는 1988년 MBC <샴푸의 요정> 드라마를 위해서 만들어진 곡이었습니다. 가사와 시상은 장정일의 동명의 시에서 가져왔으며 현대 소비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 노래가 음악적으로 충격이었던 이유는 바로 후렴구에 나오는 코드진행 때문인데, Dm - Gm - C7 - Fm7 (그녀만 보면...) 이라는 지극히 정상적인 진행에서 갑자기 Bbm7 - E7 - A7 - A/C# (슬픈 마음도...) 라는 괴상한 코드를 사용해 뒤틀린 욕망이라는 주제를 음악적으로 표현한 것이 인상적입니다. 특히 이 Bbm7 코드가 튀어나오는 부분은 굉장히 불편하게 들리는데 100% 작곡가의 의도라고 보입니다.
그럼 늦은 저녁 헤어지며 아쉬워하는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결혼식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축가입니다. 지금 들어도 가사나 편곡의 완성도가 뛰어나고 결혼을 앞둔 남녀의 감정을 섬세하게 묘사했습니다. 아마 한국의 혼인율에 유의미한 기여를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브라질 전통악기 아고고(Agogo)의 사용과 전체적인 편곡을 보았을 때는 보사노바 보다는 쌈바 쪽으로 분류할 것 같습니다.
시대를 너무 앞서간 것 같은 밴드 롤러코스터의 3집에 실렸던 곡입니다. 비록 메인스트림까지는 아니었어도 아직도 기억하고 듣는 사람들이 꽤 많은 밴드여서 한 번쯤 짚고 넘어가고 싶었습니다. 롤러코스터에서 기타를 맡았던 이상순 씨는 보사노바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롤러코스터 이후에도 "또 왜 그래" 처럼 보사노바 곡을 여럿 내놓았기에, 롤러코스터의 작업물에 보사노바가 많이 들어가 있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음악적인 부분만 놓고 보면 2집의 어느 하루, 4집의 Close to You가 좀 더 보사노바 리듬의 원형에 가깝게 편곡되었으며, Last Scene은 그보다는 2000년대 유행했던 일렉트로니카나 애시드 재즈의 느낌이 납니다. 안타깝게도 한국에서 이때는 발라드와 R&B가 꽉 잡고 있던 시절이라 노래방 가서 이런 노래를 부르면 "쟤 뭐야?" 하는 반응을 듣기 딱 좋았습니다.
한낮의 햇빛이 커튼 없는
창가에 눈부신 어느 늦은 오후
텅 빈 방 안에 가득한 추억들을
세어보고 있지 우두커니
댄스곡보다 어쿠스틱한 면이 부각된 윤상 4집의 타이틀곡입니다. 위에 이소라의 청혼을 소개하면서 브라질 악기가 쓰였다고 특기했는데, 윤상 4집에서는 까바끼뉴(Cavaquinho), 빤데이루(Pandeiro), 헤삐끼(Repique de Mao), 7현 기타 등 브라질 전통 악기가 풀코스로 등장했습니다. 해당 악기들은 모두 일본에서 세션을 빌려 썼습니다.
음악적으로도 "이사"는 조용하게 시작해서 악기가 하나씩 쌓여 가는 브라질 편곡법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습니다.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Arlindo Cruz의 "Meu Lugar"를 들어 보시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습니다. 브라질 사운드를 위해서 해외에서 세션을 구해 올 정도로 진심이었던 가요는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만히 비가 내려와 감은 내 두 눈에 앉아
낡은 라디오 노래들처럼 다시 나를 쉬게 해
2000년대로 오면서 외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보사노바 + 일렉트로니카 조합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보사노바가 가지는 편안함과 일렉트로니카 비트의 조합을 통해 대중성도 확보했고, 지금 들어도 세련된 코드진행을 가진 명곡입니다. 클래지콰이의 Gentle Rain도 비슷한 느낌과 편곡을 갖고 있습니다.
그 때 너를 그냥 지나쳤다면
우리 지금 더 행복했을까
지금까지도 수작 드라마로 회자되는 2006년 SBS <연애시대> 에 스윗소로우의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너를" 과 같이 실렸던 곡입니다. 한글로 쓴 보사노바 중에서도 명곡이라고 평가하는 이유는 사랑이 끝난 후의 담담함 을 보사노바 리듬과 편곡으로 절제되었지만 먹먹하게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드라마도 주제가도 흥행을 보장하는 자극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만들었기에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 곡은 원래 2006년 드라마 <발칙한 여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곡이었지만 2012년 브라질 세션을 통해 보사노바로 완전히 리메이크되었습니다. 이문세의 많은 곡들은 "소녀" "깊은 밤을 날아서" "가을이 오면" 등 코드나 감성이 보사노바 편곡에 정말 잘 어울렸었고 아마 본인도 그것을 알았기에 브라질까지 직접 날아가 작업한 것 같습니다.
아이유 3집 <Modern Times>에 실렸던 경쾌한 쌈바곡으로, 전체적인 맥락에서 들어보면 예전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전성기에 바치는 오마쥬의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가사에 열대 지방의 따뜻한 바다, 햇살, 피냐콜라다 등 클리셰가 들어가 있지만 어색하지는 않습니다. "Ola, muito prazer, menino bonito" 라는 포르투갈어 가사가 숨겨져 있기도 합니다.
알 사람은 다 아는 브라질 음악 매니아 루시드폴의 5집 타이틀 곡입니다. 시작부터 플룻과 빤데이루가 들리면서 쌈바풍의 편곡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곡의 영문명은 Samba de inverno(겨울의 쌈바)인데 브라질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눈이 내리는 쌈바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루시드폴 곡의 진면모는 바로 라틴음악에서는 거의 필수적이지만 한국어로는 잘 지켜지지 않는 각운의 활용에 있습니다. 스페인어, 포르투갈어는 특유의 동사변형 때문에(-ar, -er, -ir) 각운을 맞추기가 매우 수월하고 따라서 시와 노래에 폭넓게 사용됩니다. 루시드폴은 이것을 눈치채고, 라틴음악 특유의 음감을 살리고자 노력한 흔적이 노래 곳곳에서 보입니다. (없는데 / 이렇게 / 모르게...) 한 언어의 음악을 다른 언어로 재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너무 엇갈려도 너무 엇갈렸어
우리의 교통 우리의 소통
우리의 고통 내비는 먹통
래퍼가 보사노바를 작곡했는데 너무 자연스러운 이유는 바로 위에서 언급했던 각운 때문입니다. 이 노래의 가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길거리에 / 모른척 해줘요 / 길거리에 / 정리해줘요" 처럼 정석적인 라임을 맞춰주고 있으며 기리보이의 체념한 듯한 보컬과 보사노바 리듬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현대적인 한국 보사노바가 어떤 느낌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단순히 보사노바 리듬을 차용한 곡만 꼽으라면 아마 100곡 이상은 나올 것 같지만, 그 중에서 인지도가 있고 완성도가 높은 곡들만 추리다 보니 리스트가 확 줄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가볍고 통통 튀는 느낌을 주기 위해 보사 편곡을 하나의 양념처럼 사용한 경우, 그 곡이 기억에 크게 남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위에서 소개한 곡들을 보면 윤상이나 이문세처럼 현지에 가까운 수준의 브라질 사운드를 재현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한국에 브라질 음악을 하는 뮤지션이 부족한 관계로 그렇게 하진 못했습니다. 다만 인상적이었던 점은 보사노바라는 리듬이 주는 붕 떠있는 느낌을 담담함, 체념, 그리움과 같은 한국적인 정서로 재해석한 부분으로써, 우리가 흔히 라틴음악과 연관짓는 밝은 느낌에서 벗어난 시도가 보입니다.
브라질의 경우에도, Marcinha라는 행진곡 리듬은 원래 카니발에만 사용했으나, 이후 Vinicius de Moraes, Chico Buarque 등이 이를 비틀어 풍자나 사회 비판에 쓰기도 하는 등, 작곡가의 역량에 따라 얼마든지 재해석이 가능함을 보여주었습니다. 보사노바도 이와 마찬가지로 2, 3차원적인 활용이 가능하고 앞으로 한국에서도 독창적인 노래들이 나오길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