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1/3을 준비만 하는 사람들
예전에 미국인들에게 한국에서는 서른 살이 인턴을 하고 주니어로 일할 수도 있다고 말했더니 놀라워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미국, 유럽, 호주 등에서 서른 살이면 최소 1, 2번의 승진을 했거나, 대학원 학위를 따고 매니저급으로 채용되어야 할 나이입니다. 전문가까진 아니더라도 최소한 자기 분야에 일가견이 있는 사회구성원일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서른 살은 경력 1-2년차의 신입일 수 있습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요?
교육전문지 베리타스알파에서 2022년 조사한 결과 전국 탑 100 고등학교의 재수 비중이 평균 46%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되었으며 대부분이 서울/경기 고교였습니다. 2024년도 수능 응시자 중에는 31%가 재수생으로 나타났습니다. 즉 전체 고등학생의 1/3 가까이가 1년 이상을 학원에서 보낸다는 것입니다.
학생의 입장에서는 돈과 시간을 더 들여서라도 평생 따라붙는 "학벌"이라는 나의 등급을 올리고 싶어 하지만, 사실 기업 채용 담당자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다 새로 가르쳐야 할 신입들이고 1년 더 문제를 풀었다고 해서 뛰어난 인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업무에서는 오히려 이해력이나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단순 지능보다 더 중요합니다. 일본의 도요타처럼 차라리 고졸을 뽑아다 4년 가르치면 그 사람은 남들이 문제 풀고 강의 듣고 있을 동안 어엿한 장인이 되어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세상이 곧 올 것 같지는 않고 오늘도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이 부모님의 통장에서 재수학원, 일타강사들의 주머니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한국의 현역 판정률은 80-90%대로 전쟁 중인 국가를 방불케 하는 높은 수준입니다. 즉 20대 남성은 거의 확정적으로 2년의 경력 혹은 학력 단절이 일어나게 되며, 재수나 휴학을 했다면 대학 졸업장을 25-27세가 되어서 받게 됩니다. 외국에서는 군대 갔다 왔다고 하면 꽤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우도 있으니(특히 미국) 아주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지만, 딱히 경력이라고 쳐줄 만한 보직이 많지 않아서 애매합니다. 군대와 대학을 다 끝내면 이제 취직할 수 있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한국의 평균 취준 기간은 11개월으로 사실상 1년을 다시 공부하면서 보냅니다. 아마 1년 이상 소요하는 사람도 꽤 될 것입니다. (미국은 참고로 졸업 후 3-6개월 정도를 준비합니다.) 다른 나라에 비해서 "스펙 쌓기"라고 불리는 준비 과정이 지나치게 복잡하고, 공기업과 공무원의 경우 취업 재수를 노리는 지원자들도 많아서 여기서도 1, 2년 이상이 소요됩니다.
재수 + 군대 + 취준을 모두 마무리하고 나면 드디어 28살, 늦으면 30이 다 되어서 파릇파릇한 신입으로 입사할 수 있습니다. 아마 입사해서도 처음 1년 정도는 업무를 배우느라 여유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돈을 모아서 독립하고 결혼 준비를 해야 하는데, 2-3년 월급 받아서 1억 이상 모으기는 쉽지 않습니다.
특히나 요즘처럼 물가도 높고 즐길거리도 많은 시대에 선택적 지출을 0으로 만들고 모은 돈을 안정적으로 투자할 일가견이 되는 사람은 소수일 것입니다. 오히려 많은 사회초년생들이 카더라와 유튜브 강의에 혹해서 단타매매, 가상화폐, 갭투자 등 고위험 올인 투자로 그나마 모은 돈마저 날리는 것이 현실입니다.
즉 한국의 30대가 재수 + 군대 + 취준 3 콤보를 얻어맞으면서 33, 35세가 넘도록 결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외국에서는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취직해서 일하면 서른에 6-7년의 경력이 쌓이는데, 한국에서는 사회 진출 시기가 늦기 때문에 막대한 자본금이 들어가는 결혼과 육아를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한국은 전세라는 특이한 제도가 있어서 월세 대신에 한 번에 큰돈이 필요하니 다른 국가들에 비해 준비 기간은 더욱 늘어납니다.
아시아에서도 독보적으로 낮은 한국의 결혼율과 출산율은 "한국에만 있는 제도"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빚어낸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