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재벌, 럭셔리 시계에 도전하다
오늘날 롤렉스 • 오메가 • 까르띠에로 대표되는 고가 예물시계 시장에 국산 시계가 낄 자리는 없지만… 한국도 한때 럭셔리 시계 시장에 진출했던 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1980-90년대 회사의 운명을 걸고 수입 시계에 도전했던 삼성시계의 역사를 알아봅시다.
삼성은 1970년대부터 카파라는 시계를 만들기 시작했으며 1983년에 삼성시계(Samsung Watch Company; SWC)가 정식 계열사로 재탄생했습니다. 이 시절 삼성시계는 스위스의 론진(Longines)과 일본의 세이코(SEIKO)사와 기술 제휴를 맺고, 라이센스 생산을 시작했습니다. 삼성 임원 진급 시 축하 선물로 론진 시계를 받는 것은 이때의 전통에서 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1980-90년대 삼성시계는 MBC의 "아홉시를 알려드립니다"에 고정 출연하며 카파, 돌체로 국내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989년 신문기사를 보면 삼성의 론진과 돌체가 예물시장에서 꽤 인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가격은 60만원에서 최고가품은 2백만원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90년대 초부터 삼성시계는 재고가 쌓이고 매출이 30%씩 쪼그라들며 벽에 부딫히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수입산 시계가 국내 시장의 20% 이상을 차지하였고, 포화 상태인 국내를 벗어나 고가품으로 해외시장을 개척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그래서 1994년 삼성시계는 "고가 자체브랜드를 개발해서 해외로 나가자"는 야심찬 목표를 세우고 제 2의 창업을 선언하게 됩니다.
이렇게 94년 기업의 회생을 걸고 삼성시계는 스위스로 날아갔습니다. 삼성의 첫 성공적 딜은 1995년 1월 피케레(Nouvelle Piquerez) 케이스 제조업체였습니다. 이제 기술을 손에 넣었으니 브랜드를 가져올 차례였고 삼성 출장단은 하나씩 스위스 회사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삼성이 스위스로 건너간 시기 스위스 시계산업은 쿼츠 파동(Quartz Crisis)이라는 직격탄을 맞고 10년 넘게 정체되었다가 회복하고 있는 시기였습니다. 스위스도 쿼츠 기술은 보유하고 있었지만 시장의 변화를 빠르게 따라가지 못하였고, 영세업체의 1/3이 문을 닫거나 매각되었습니다. 따라서 삼성의 자금력과 의지로 브랜드 하나 정도는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시기 삼성은 명품시계의 대명사 롤렉스를 찾아가 인수 제안을 했으나 단칼에 거절당했다고 합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아마 롤렉스가 비영리재단(Hans Wilsdorf Foundation)이기 때문에 사기업과의 합병이 법적으로 곤란하다고 답했을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는 삼성시계에서 예전에 근무했던 시계장인의 인터뷰에서 따왔습니다.
삼성은 포기하지 않고 다른 스위스 브랜드 제니스(Zenith)의 인수도 추진했습니다. 엘 프리메로(El Primero) 크로노그래프로 유명한 이 브랜드 역시 모종의 이유로 삼성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이후 제니스는 삼성이 불렀던 값의 두 배를 받고 LVMH그룹에 매각됩니다. 이 이야기는 당시 삼성의 M&A 컨설턴트로 일했던 분에게 들었습니다.
삼성은 결국 스위스에서 장소를 옮겨 독일로 날아가 카메라 제조사 롤라이(Rollei)를 1995년 인수하고 시계 크리스탈 가공 기술을 손에 넣었습니다. 아마 롤렉스랑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도 한몫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롤렉스는 상표가 유사하다는 이유로 유럽에서의 롤라이 시계 판매에 법적으로 제동을 걸었고 독일에서 승소했습니다.
어찌되었든 유럽의 브랜드를 확보한 삼성은 곧바로 고가품 생산과 판매에 나섰습니다. 스위스 현지에서 디자인하고 피케레 공장에서 생산했다는 설명을 덧붙이고 6백만원짜리 최고가 금시계를 출시했습니다. 때는 1997년 4월이었습니다. 과연 롤라이는 한국의 롤렉스가 될 수 있었을까요?
모두가 알다시피 1997년 한국을 강타한 외환위기로 인해 삼성을 비롯한 많은 기업들이 체제 개편에 들어가야만 했고 삼성시계는 매각될 운명에 처했습니다. 하지만 공들였던 자신들의 회사를 차마 버리지 못했던 임직원들은 "우리가 사겠다"며 종업원매수(Employee buyout)로 삼성시계를 사들여 SWC로 사명을 바꾸었습니다.
SWC는 카파, 뷰렛, 하스앤씨, 엑시토가 등 자체 브랜드를 활용해서 2000년대 한국시계의 자존심을 지켰고 2015년에는 ROTC시계를 출시해 완판하는 성공도 거두었습니다. 2017년까지는 판매를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회사명을 바꿨거나 사라졌는지, 그 이후의 족적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언젠가는 한국에서 명품시계가 생산되는 날이 올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