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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라질소셜클럽 Feb 17. 2024

결혼이라는 제도는 왜 모든 문명에서 탄생했을까?

모성 인권 보호의 역사

어떤 사람이 아직 약혼하지 않은 처녀를 꾀어서 건드리면, 그는 반드시 신부의 몸값을 내고,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야 한다.
- 출애굽기 22:16


고대 그리스의 결혼


오늘날 "결혼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라고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매우 다양한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연애결혼의 역사가 비교적 길었던 서양에서는 "사랑의 확인"과 같은 추상적인 의미를 주로 꼽을 것이며, 중매결혼을 하는 인도와 유교사상을 따르는 동아시아에서는 "가정 간의 결합"에 중점을 둘 것이고, 독실한 이슬람이나 기독교 신자들은 결혼과 함께 동반하는 출산을 "신께서 내린 축복"과 같은 종교적 의미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나라마다 풍습과 재물의 교환, 남성과 여성의 권리 등에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결혼제도의 특수성이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문명국가에서 자발적, 독자적으로 발전"한 제도라는 점입니다. 일부 공동육아를 하는 외딴곳의 부족을 제외하면 세계의 모든 문명에서 결혼이라는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법적으로도, 사실혼관계와 친자 인정, 간통, 이혼에 대한 조항은 메소포타미아의 함무라비와 우르남무 법전, 이스라엘의 구약 성경, 인도의 마누 법전 등 문명의 태동기부터 찾아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고대 한반도 고구려, 부여의 율령법에도 이 같은 조항이 발견됩니다. 인터넷이 있던 시절도 아니고, 나라들끼리 서로 협의한 것도 아닌데, 왜 이런 법이 세계 공통으로 발견될까요?




연애와 결혼, 이혼을 제도화하고 범법자에게 사형까지도 부과하는 강력한 처벌을 내려야 했던 데는 인류 공통의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친부 없이 출산하는 여성이 겪는 신체적, 심적, 경제적 고통과, 그 아이가 자라나야 하는 척박한 환경이 사회적인 재앙과도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결혼제도의 탄생 배경과 본질은 전 세계 공통으로 "출산하는 여성과 그 아이에 대한 보호"에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만 했는지 하나씩 알아봅시다.




임신에 따르는 노동력 손실

아포칼립토(2006)


여성은 임신 초기부터 출산 직후까지 280일이 넘는 긴 기간 동안 갖은 고통과 후유증을 겪게 됩니다. 경제 활동은 물론이고 일상생활도 힘든 약자가 되었는데, 친부를 알 수 없거나 친부가 책임지지 않고 사라져 버린다면, 그 돌봄 부담은 고스란히 여성의 가족이나 마을 공동체에 전가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 성경에서 "처녀를 건드리면 혼인을 하라"고 못 박은 것이며, 그다음 구절에서는 "그러나 딸의 아버지가 도저히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혼인 대신 신부값으로 대신하라"고 선택지까지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도와 이슬람, 아프리카 등 많은 문화권에서 신부값(bride price)이 발달한 것도 여성의 출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신부값은 여성을 아내로 데려가면서 외가에서 발생하는 노동력의 손실을 보상하는 1차 목적이 있었고, 임신한 아내와 자식을 부양할 수준이 되는지를 증명하라는 2차 목적이 있었으며, 일부 문화권에서는 이혼할 시 돌려받게 되는 비상금의 역할도 겸했습니다. 이것은 모두 아이를 낳고 기르는 여성과 자녀의 미래를 보호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제도였습니다. 결혼과 출산에 앞서서 이렇게 철저한 대비를 해야만 했던 이유는 바로...




산모와 영아 사망 위험

로힝야 난민캠프에서 태어난 아기


19세기 이전까지 산모 사망률은 7-10%에 이르는 매우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즉 열 명 중 한 명이 아이를 낳다가 사망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과 같은 개발도상국에서도 1960년대까지 산모 사망률이 1%대로 높은 편이었습니다. 아이를 무사히 낳더라도 영아 사망이 빈번해서, 한국과 마찬가지로 많은 문화권에서 갓 태어난 아기에게 임시 이름을 붙여주거나 아예 이름 짓지 않기도 했습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영아 사망률은 1960년대까지 1,000명당 160명에 달하는 높은 수준이었지만 오늘날 아시아는 20명대로 크게 감소한 반면, 아프리카는 여전히 60명을 넘기고 있습니다.


이렇듯 출산이 생사를 넘나드는 위험한 일이었고 자칫하면 산모와 아이 둘 다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하기도 했기 때문에, 친부에게 제도적으로 부양의 책임을 지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제적으로 궁핍할수록 산모와 영아 사망률이 높은 것은 고대나 현대 모두 똑같고, 친부가 없는 여성과 아이의 사망률은 몇 배 더 높았을 것입니다. 고대 법전에서 간음한 남녀를 사형에 처하라고 한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습니다. 경제적, 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여성이 홀로 출산을 하다가 죽을 확률이 너무나 높았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아이를 낳더라도 그 아이의 미래는 처참할 따름이었습니다.




고아 문제

런던 슬럼가의 고아들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이 시작한 초기 기독교는 사실 가정의 형성과 자녀의 교육에 지금처럼 제도적인 관심이 없었습니다. 애초에 창시자인 예수님부터가 결혼을 하지 않았고, 그의 제자들도 모두 안정적인 가정과는 거리가 먼 수도자와 순교자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곧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대비가 지상 과제였지 자녀의 학교 성적이나 취직 따위가 중요한 목표는 아니었습니다.


교회가 본격적으로 가정과 결혼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중세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마을 공동체가 아닌 대도시가 발달하게 되면서였습니다. 고대에 비해 모르는 사람 간의 접촉이 늘어나고 여성들이 바깥일에 종사하기 시작하면서, 유럽의 도시들에 원치 않는 임신으로 인한 고아가 크게 늘었습니다. 이 아이들을 길거리에 방치했다간 범죄자로 전락하기 쉬웠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고아원을 설립해 아이들을 돌보는 한편, 남녀 간의 정사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15세기 프랑스 몽펠리에 시에서 기록된 일화를 보면 남녀관계에서의 교회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시청 앞에 한 아기가 버려지자, 시청 직원들이 수소문하여 아기의 친모 아그네스를 찾아냈습니다. 면담 결과 아그네스는 자신이 토마스라는 남자와 포도밭에서 관계를 맺었다며 그를 친부로 지목했습니다. 이에 시청 직원들은 토마스를 소환해 양육비를 댈 것을 종용하였으나 토마스는 자기가 아버지가 아니라며 발뺌하려 했습니다. 그러자 아그네스는 교회 신부를 찾아가, 토마스와 마을 사람들 앞에서 성 안토니의 유물에 손을 얹고 본인의 진술이 사실임을 맹세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토마스는 결국 동요하면서 자신이 아버지임을 고백했고 3년간 양육비를 지급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위 일화에서 보듯이 엄연히 공공기관인 시청과 법정이 있었지만 결국 문제를 해결한 것은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고아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가 있었으니...




영아 유기/살해

아이들을 살해하려 하는 메데아, 외젠 델라크루아(1838)


어머니가 갓난아이를 버리거나 살해하는 내용의 설화는 그리스의 메데아부터 멕시코의 라 요로나까지 전 세계 공통으로 발견됩니다. 그 이유는 대체로 성범죄, 아이의 친부에 대한 복수, 혹은 도저히 아이를 키울 수 없는 환경 셋 중 하나였습니다. 13-14세기 들어 프랑스 북부 대도시에 고아원과 복지 시설이 발달하기 시작한 이유도 워낙 많은 여성들이 아기를 교회 문 앞에 버리고 갔기 때문입니다. 파리에서 공부했던 교황 이노센트 3세는 이 문제를 잘 알았고 고아, 미혼모 복지에 적극적인 지원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복지 시설은 같은 시기 스페인, 이탈리아로도 퍼져 나갔으며 대도시들이 심각한 고아 문제로 고생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유럽의 도시들은 버려진 아기들을 젖먹이는 유모들을 공공기금으로 지원해 주며 따로 관리했습니다.


이렇게 버려지는 아이들은 이름과 "꼭 다시 만나자"는 쪽지를 동반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남녀 간의 결혼을 최고로 신성시하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영아, 고아 복지를 전담했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친부에게 양육의 책임을 지우지 않으면 안 되었고 지금처럼 DNA 친자검사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종교의 힘을 빌어서 결혼제도에 신성성을 실어준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친부 없이 출산한 여성과 그 자녀는 사회 최하층으로 떨어지거나 버려져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는" 현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포스트에서는 프랑스와 유럽의 예를 주로 들었지만, 이슬람 문화권이나 아시아에서도 임신한 여성에게 동일한 문제가 발생하였고 결국은 친부에게 법적인 책임을 강제하는 제도로 이어졌습니다. 물론 그것만이 결혼의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지만, 문명이 발전하고 대도시가 발달하면서 남녀 간 문제를 더 이상 도덕, 관습에만 맡길 수 없었다는 점은 전 세계 공통으로 나타납니다.


결혼제도의 탄생 배경이 출산과 양육에 있기 때문에, 출산이 점점 감소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는 결혼의 의미가 재조명되는 추세입니다. 서유럽, 북유럽의 경우 혼외 출산이 절반을 넘을 정도로 결혼과 출산을 따로 분리해서 생각하고 있고, 그 반대로 한국의 경우 아이를 세계에서 가장 낳지 않는 나라임에도 결혼은 비교적 꾸준히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 한국의 가까운 미래가 "출산 없는 결혼"이 가져올 전방위적 사회 변화를 미리 보여줄 거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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