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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라질소셜클럽 Mar 23. 2024

너무 성공해 버려서 문제가 된 한국 정책들

"셋도 많다"

아이 좀 그만 낳아주세요(1960-1996)


요즘은 아이 셋, 아니 둘만 낳아도 애국자 소리를 쉽게 듣는 세상인데, 80, 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은 제발 아이 좀 그만 낳아달라는 나라였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임기 막바지에 합계출산율을 2.1명으로 저하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무려 4년이나 앞서서 1984년 1.76을 달성해 버렸고 한국 정부는 2000년대가 넘어서까지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다가 1명대 아래로 추락해 지금의 세계 꼴찌라는 웅장한 결과를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포스터 표어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한국이 농경 사회를 벗어나서도 꾸준한 출산율을 기록할 수 있었던 건 남아선호사상과 연관이 있습니다. 90년대까지도 아들을 못 낳은 며느리를 죄인 취급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나올 때까지 계속 낳다 보니 2명, 3명이 된 것입니다. 비슷한 현상은 인도에서도 나타나며, 중국은 강력한 제한 정책으로 덮어놓고 낳을 수 없다 보니 아들을 돈 주고 사 오기까지 하는 현상도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 남아 선호 현상이 역전되기 시작하고 남녀평등사상이 확산되자 더 이상 아들을 낳기 위해 여러 번 출산할 이유가 없어졌고, 출산은 더 이상 집안을 이을 아들이라는 대가족적 목적이 아닌 단순히 "내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은가"라는 부부간의 선택으로 바뀌었습니다. 둘이 살기도 힘든데 "손자"라는 강력한 사회적 압력이 없어지자, 한국의 출산율은 자연히 급감하였습니다. 아마 출산율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한국의 산아제한정책이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정책으로 꼽히는 날이 올 것 같습니다.




쌀 좀 그만 먹어주세요(1960-70)


한국은 옛날부터 쌀밥 많이 먹는 나라로 유명했습니다. 중국, 일본 사신들은 한국인들의 밥 양을 보고 놀랍다고 기록했고, 일제 강점기에도 쌀 소비량을 줄이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쌀 소비 제한이 본격적으로 강하게 추진된 것은 1970년대부터로, 박정희 정권은 군대식으로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 국민들로 하여금 쌀을 덜 먹게 했습니다. 이때부터 10년 넘게 학교부터 직장까지 밥의 무자비한 단속이 시작되었습니다.


학교에서 30% 이상 혼식하지 않는 도시락 단속
매주 수요일, 토요일 쌀로 만든 음식 못 팔게 함
쌀을 이용한 술 만들기 금지
관공서, 학교 구내식당에서 혼식 시행
상업 광고에 혼분식 장려 메세지 삽입
설렁탕, 국밥에 국수 추가
라면 소비 권장


라면을 먹어서 나라를 구하자


이 시절 라면이 뜻밖의 수혜자가 되었는데 정부가 원하던 정책의 방향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입니다. 1963년 한국 최초 라면인 삼양라면이 출시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직접 맛을 보고는 고춧가루를 더 넣자며 재료비에 보태라고 지원금을 주기까지 했습니다. 한국인들이 라면국물에 밥을 말아먹는 바람에 기대했던 것만큼의 쌀 절약 효과는 없었다고 하나... 혼식 장려 덕분에 한국 라면이 지금의 글로벌 히트 상품이 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 범사회적인 쌀 못 먹게 하기 운동은 1977년 쌀 자급자족이 이루어지고 빵이나 국수 등 취향이 다양해짐에 따라 사라져 갔지만, 한번 줄기 시작한 쌀 소비량은 계속 줄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2020년에는 30년 만에 쌀 소비량 반토막이라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고, 한국의 쌀과 밀 소비량이 거의 비슷한 수준까지 왔으며, 2022년에는 처음으로 육류가 쌀 소비량보다 높아졌습니다. 이제는 반대로 정부가 나서서 쌀 소비를 독려하고 상품을 개발해야 하는 수준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급격한 식습관 변화는 아시아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든 수준인데, 마치 베트남 사람들의 식습관이 30년 만에 인도의 식습관으로 바뀌는 것과 비슷하다 볼 수 있습니다. 인도는 남부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난, 로티처럼 밀은 주식, 쌀은 부식으로 먹는 나라인데 한국도 거의 그렇게 되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서울, 강남에 좀 와서 살아주세요(1970)

강남 거길 왜 감?


출산율과 더불어 한국이 가장 성공시킨 정책 중 하나가 바로 서울, 강남 이주 정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 들으면 어이가 없지만 1970-80년대 당시에는 정부가 국민들에게 소가 밭 갈고 있는 대치동, 압구정동에 제발 와서 살아달라고 설득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서울 = 사대문이라는 공식이 익숙했던 주민들은 근본 없는 강남 아파트 따위에 굳이 갈 이유가 없었습니다.


제발 대치동 좀 와주세요


각종 인프라와 교육시설이 부족했던 강남을 띄우기 위해 정부가 준비한 신의 한 수는 바로 명문 학교를 강제로 이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서울고, 경기고, 휘문고, 중동고 등 8개 학교가 1980년대 대거 지금의 대치동, 삼성동, 도곡동으로 이전하면서 강남 8학군의 전설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로 단 20-30년 만에 강남은 기피 지역에서 상류층의 전유물로 완벽하게 탈바꿈했습니다.


명문 학교가 다 모여 있다 보니 대치동을 위시한 강남의 교육열은 천장을 뚫고 치솟아 버렸습니다. 밤 10시가 넘어서까지 아이들을 관리하고 버스에 태워 귀가시켜주는 거대한 교육산업 컴플렉스와 연예인급 연봉을 받는 일타강사가 생겨났으며, 명문 학원에 들어가려고 따로 입학시험을 준비해야 하는가 하면, 어지간한 대학에는 만족도 하지 못해 50%에 가까운 재수 비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강남 8학군은 한국 전체가 벤치마킹하는 K-교육의 월스트리트 같은 존재가 되었으며 치솟는 사교육비와 학생들의 심각한 정신건강 문제에도 불구하고 전혀 변화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과연 80년대엔 이렇게 될 줄 알았을까요?



또 어떤 정책이 지금과 정반대의 결과를 의도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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