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같은 바다 다른 느낌, 이파네마

히우의 바닷가를 걷다

by 브라질소셜클럽
Tall and tan and young and lovely
The girl from Ipanema goes walking...



어느 날 평소 해운대 가던 사람들이 "광안리의 소녀"라는 노래를 듣고 죄다 광안리에 몰린다면 어떻게 될까? 이파네마는 노래 하나 덕분에 옆에 있던 코파카바나를 제치고 세계에서 거의 제일 유명한 해변가가 되었다. 브라질에 힘들게 갔는데 이파네마를 안 볼 수는 없다. 나는 발이 아플 것을 알면서도 해안선을 공유하는 히우의 세 해변가를 모두 걸어보았다. 코파카바나에서 시작해 이파네마를 거쳐 르블롱까지.


무교동 코파카바나 말고...


코파카바나는 이국적인 느낌의 이름 덕에 브라질과 전혀 관련 없는 곳에도 여기저기 많이 쓰이는 지명이 되었다. 1980년대를 사로잡았던 배리 매닐로(Barry Manilow)의 히트곡 Copacabana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코파카바나에 대한 궁금증을 심어주었지만 가사를 잘 들어보면 "hottest spot north of Havana"라는 부분에서 브라질이 아닌 미국의 클럽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매닐로의 디스코처럼 화끈하고 신나는 동네일 것 같지만, 코파카바나는 부촌이라 그런지 비교적 조용하고 깨끗하다. 그럼에도 내가 코파카바나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는데 바로 이 동상 때문.


Dorival Caymmi 동상


동상에 으레 따라붙는 높은 지지대도 없고 명패도 없이 해변가에 조용히 서 있는 이 아저씨의 이름은 도리발 카이미(Dorival Caymmi), 브라질 음악의 거장이다. 북쪽의 바닷가 도시 바이아에서 태어난 카이미는 젊었을 때 라디오 스타의 꿈을 안고 히우로 건너와서, 1933년 "O Que e Que Baiana Tem?" 으로 처음 히트를 쳤다. 그는 평생 많은 양의 곡을 쓰지는 않았지만 대부분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가사와 멜로디를 가지고 있어 지금까지 쌈바는 물론 보사노바 가수들에게도 꾸준히 불려지고 있다. 브라질 현대음악을 대표하는 카에타누 벨로주(Caetano Veloso)는 카이미를 두고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400곡을 쓰고 카이미는 70곡을 썼지만,
그는 완벽한 70곡을 가지고 있고 나는 아니다.


카이미는 94세까지 장수를 누리고 2008년, 말년을 보냈던 코파카바나의 자택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바다에서 죽는 것은 달콤하다" 고 노래했던 그와 어울리는 마지막이었다. 평생 바닷가와 시골의 일상을 노래했던 그였기에, 브라질 사람들은 카이미에게 높고 화려한 동상 대신, 바닷가를 걷는 시민들에게 반갑게 인사하는 역할을 맡겼다. 나는 한참을 서서 동상을 바라보았다.


작별의 노래 - 도리발 카이미


나는 일하러 노를 저어 바다에 나갑니다, 내 사랑
신께서 원하신다면, 내가 바다에서 돌아올 때 좋은 물고기를 잡아오겠소
(Canção de Partida, Dorival Caymmi)




이파네마에도 물론 이파네마를 대표하는 동상이 하나 있다. 누구인지 말 안 해도 다 알 것 같다.


Antonio Carlos Jobim


히우 공항의 이름도 조빔으로 개명되었을 정도로, 브라질의 현대음악사는 조빔 전과 후로 나뉜다. 그가 히트시킨 보사노바로 인해 브라질 음악은 남미의 흔한 댄스음악에서 비틀스와 맞짱을 뜨는 최첨단 유행이 되었으니까. 조빔의 동상은 살아생전 그의 성격을 반영한 듯 사색적이고, 조용히 앞을 보고 걸어가고 있다. 정겨운 카이미 아저씨 옆에선 사진을 찍고 싶지만 조빔은 어딘가 가만히 내버려 둬야 할 거 같은 모습이다. 코파카바나와 이파네마의 차이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랄까.


평온한 오후, 이파네마의 바에서 차가운 생맥주
르블롱까지 해안가를 따라 걷기...
(Ligia, Antonio Carlos Jobim)


6월 비수기에는 이파네마에도 사람이 많이 없었다. 나는 걷다가 지쳐서 해변가 매점에 가서 까이삐링야 하나를 시켰다. 인심 좋게 생긴 아저씨는 바텐딩 계량컵 따위 없이 독한 까쌰싸를 콸콸 부어서 칵테일을 만들어주었고 그걸 다 마신 나는 이파네마 해변가의 벤치에 누워 30분 정도 기절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탈탈 털려도 이상하지 않은 위험한 짓이었지만 술 신의 가호가 있었는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파네마의 바다가 크게 특별하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여기만큼은 꼭 가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필수코스가 있다. 이파네마의 끝 부분 Arpoador라고 불리는 반도 모양의 바위는 "이파네마의 소녀"라 명명된 작은 공원을 거쳐 들어갈 수 있는데, 약간 숨겨져 있어서 그런지 나는 이곳이 북적거리는 해변가보다 좋았다. 모래사장이 아닌 바위라 느낌이 색다르다.


Arpoador의 일몰




이파네마에서 조금 더 밑으로 걸으면 깔끔한 해변가, 르블롱(Leblon)이 나온다. 이 깨끗하고 조용한 동네에는 사실 히우 최고의 술집 중 하나가 숨어있다. 바로 까쌰싸 학교(Academia da Cachaça).


까쌰싸의 향연


술은 어느 나라나 그렇듯 농사와 밀접하게 발전한다. 미국의 개척시대, 옥수수를 대량으로 재배하던 농부들은 그것을 위스키로 만들어 유통하면 상하지도 않고 더 비싸게 팔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세금을 매기자 반란을 일으킬 정도로 농부들에게 위스키는 중요했다) 세계 최대 사탕수수 생산국인 브라질에서도 예외는 없었다. 까쌰싸 증류 산업은 유럽인들의 도착과 함께 브라질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가, 현재 브라질에는 7,000개가 넘는 까쌰싸 브랜드가 팔리고 있다. 잘 와 닿지 않는다면, 브라질 지방자치단체의 수가 5,500개라는 사실을 참고하면 느낌이 올 것이다. 거의 동네마다 하나씩 있다는 말이다. 그런 만큼, 가격과 맛도 천차만별이어서 차에 넣는 게 아닌가 싶은 맛의 술도 있고 고급 코냑이나 위스키처럼 나무통에 오래 숙성시킨 명품도 있다.


브라질에서 소비되는 절대다수의 까쌰싸는 숙성하지 않은 거친 맛의 대량생산품이지만 Academia da Cachaça에 가면 눈이 아플 정도로 빽빽한 까쌰싸 리스트를 볼 수 있다. 하지만 긴 설명 필요 없이 이곳의 까이삐링야만 마셔도 까쌰싸 학교에서 많이 배우고 가는 것이다. 신선하고 노란 라임과 브라질산 꿀 그리고 고급의 까쌰싸가 들어간 특제 칵테일을 마시면 다른 까이삐링야는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술 한 잔과 밤바다의 조합은 항상 옳다. 나는 아쉬움에 같은 걸 한 잔 더 시켰고 르블롱에도 말없이 해가 저물었다.



매거진의 이전글3. 대낮에 털릴 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