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할지 언정 사람을 미워하지는 말라고
백석의 時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로 시작한다.
안도현은 백석 평전에서 “첫 눈이 내리는 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말은 백석 이후에 이미 죽은 문장이 되고 말았다”고 했다. 시인들의 시인인 백석의 시집 ‘사슴’을 구하지 못한 윤동주는 도서관에서 백석의 시집을 빌려, 직접 필사해 지니고 다녔다. 우리에게는 백석이 ‘난’이라고 불렀다던 박경련과 자야와의 러브스토리로 유명하기도 한 모던보이 백석은 해방후 고향인 정주와 평양에서 살다가, 40대 후반부터는 함경도 맨 꼭대기 삼수군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지낸다.
김연수의 <일곱 해의 마지막>은 백석이 남북으로 갈라진 평양에서, 그리고 김소월의 시에도 등장하는 험한 산골 ‘삼수’에서 남은 삶을 보내기까지를 (조금이나마 추적 가능한) 그의 흔적들을 토대로 쓴 소설이다. 백석의 시만큼이나 낭만적이서 좋은 글감이 될 백석의 러브스토리를 제껴두고, 김연수 작가가 백석의 암흑기를 다룬 이유는 아마도 안도현 작가만큼이나 백석을 애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백석을 흠모해 <백석 평전>을 쓴 안도현 작가는 삶은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라며, 정치와 역사에 굴절되었던 백석의 특수한 순간들을 위로하였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특수한 순간까지도 껴안을 수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김연수 작가 또한 <일곱 해의 마지막>에서 계급 사상과 적개심을 선동적으로 드러낸 時 만 인정받는 상황에 좌절하는 백석에게, “좌절할지 언정 사람을 미워하지는 말라고, 운명에 불행해지고 병들더라도 스스로를 학대하지 말라고. Ne pas se refroidir, Ne pas se lasse(냉담하지 말고, 지치지 말고)라며,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통해 말을 건넨다.
Ne pas se refroidir, Ne pas se lasse는 아마 김연수 작가가 <아미엘의 일기>에서 인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앙리 프레데릭 아미엘은 자신의 일기에서 “환상을 품지 않고 희망 없이도 인생을 견뎌내는 일이 의무”라고 말하기도 했고, “삶을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 장님이 될 필요가 있다”고도 했다.
백석은 자신의 운명을 알았던 것일까? 백석의 일생은 결국 백석의 시와 닮았다. <일곱 해의 마지막>은 백석이 바라본 흰 바람벽의 스크린에 계속 돌아갔을 오래된 필름을 되돌려보는 소설이다.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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